또 불합격했다. 글자 앞에 불(不) 자가 들어가면 내가 늘 다른 사람보다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어 속상하다. 사실 속상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다 때려치우고 싶다.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많다는 의미일 거다. 온라인 속 관련 카페에 들어가면 합격했다는 사람들의 글이 눈에 띈다. 처음에는 축하해 줘야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가도 계속 보면 조금 짜증이 난다. 마음이 불편하여 화나는 손으로 스크롤을 미친 듯이 한다. 그 사람들에 대해서가 아닌 나에 대한 짜증이다. 지금껏 살면서 해낸 것이 얼마나 있던가.
이루는 것 없이 닥치면서 살았다. 나 스스로 무언가 이루어냈다고 생각한 적이 별로 없었다. 어릴 적 자전거를 넘어지면서 배운다고 하더니 나는 다리가 길어진 이후 넘어지지 않고 배웠다. 너무 늦게 자전거를 배워서 스스로 이루었다고 감탄한 적 없었다. 컴퓨터 학원 다닐 때 자격증 시험에 필기부터 떨어져 이쪽은 내 길이 아닌가 보다 하며 살았다. 대학에 농어촌전형이 있어 한 번의 결정으로 지방에 있는 대학을 다녔다. 다른 곳엔 시도도 못 해보고 가기로 한 곳에 던져졌다.
홀로 살 수 있을 것만 같다고 느낀 적이 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살던 대학 시절 누구의 간섭도 없이 스스로 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사실상, 대학등록비와 기숙사비 등 생활비를 포함한 모든 비용은 부모님의 해진 주머니에서 나왔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혼자 해낸 것 같지만, 절대로 홀로 해내지 못한 내 안의 작은 경미는 점점 더 위축되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정녕 없는 것인가. 자립할 수 없는 나를 세상에 내놓을 수 없다는 일은 가슴 아픈 일이다.
어쩌면 그래서 결혼을 일찌감치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부모로부터 독립하면서 지금까지 길러준 부모로부터 되갚아야 할 것만 같은 마음이 든 것은 작아진 사람에 대한 은혜 갚음이라고 해두자. 부모는 받으려고 하지 않지만, 나는 그것을 갚아야만 후련할 것 같은 속 좁은 인간의 방편이다. 홀로 이루어내지 못한 죄책감을 떨쳐내고픈 마음 한 자락을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사는 것은 그냥 사는 거다. 뭘 해내야만 살 수 있는 건 아닐 거다. 흐르는 물처럼 인생에 굴곡이 없으면 어디 그게 인생인가. 내가 예전에 '나는 참 평탄한 삶을 산 것 같고, 평범했지.'라고 생각했다. 별일 없이 초중고등학교를 나와 대학을 나왔다. 그것은 순리라고 누군가 그랬다.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았다. 멀리 고향 떠나 살아봤고, 결혼 반대도 있었다. 전업주부를 하면서 나를 잊어가며 아파했다. 나름 힘든 삶이었지만 그렇지 않다고 느낀 건 순전히 가족이 나를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뿌리로 인해 나는 건강한 잎을 생산할 수 있는 나무가 된 것일지 모른다.
불가능한 합격을 앞에 놓아도 또 도전할 수 있는 건 합격하리라는 나를 믿어주는 가족이 붙잡고 있어서다. 그래서 떨어져서 슬프고 아프지만, 나는 또 이력서를 쓴다. 서른 장이고 마흔 장이고 다시 쓴다. 불합격을 합격으로 바꿀 수 있게 가능성의 운동장에서 마구 뛰어놀 수 있게 가족들은 함께 운동회를 연다. 서로를 마구 응원하면서 다치지 않기를 걱정하면서 모두가 1등이 되는 운동회를 개최한다.
가족이 없다면 나를 온전히 보아주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가족과는 다르다. 가족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믿는다. 왜곡되게 보이는 것도 그의 마음을 알기에 되돌아오리라는 믿음이 있다. 돌고 돌아 가족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