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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그리 유경미 Dec 05. 2024

달팽이가 말했다

난 그저 풀을 뜯어먹고 있었을 뿐이라고. 다른 건 원하지도 않아. 이렇게 갇혀 지내는 건 싫어.

까만 점 같은 두 눈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내게 말했다. 우리 집에 온 건 우연이었다. 누군가 데려오고 싶어서 가져온 것도 아니다. 상추는 사람들이 뜯어먹으려 재배할 뿐이었고, 그저 상추를 좋아한 달팽이는 내게로 보내졌을 뿐이다. 냉장고에 든 상추를 꺼내 커다란 볼에 담고 물을 부었다. 흙이 불어 물에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잠시 부엌 자리를 떠났다. 이내 돌아와 수돗물을 틀어 상추를 하나하나 씻었다. 마지막 상추까지 그릇에 올려 넣고 물을 버리려 볼을 뒤집는 순간 볼 바깥쪽에 무언가 있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누군가가 붙어있었다.

달팽이였다. 물로 흘려보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외면하고 아파트 밖 흙에 던져버릴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어쩐지 딱 붙어있는 것이 애처로워 보였다. 어딘가 붙어있지 않으면 버려질 것 같은 기분이 달팽이에게도 들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집으로 사용할 통을 찾았다. 십몇 년 전에도 달팽이를 키운 적 있었다. 그때는 어찌어찌 잔인하게 말라 죽였지만 그래도 남겨진 집이 있을지 몰랐다. 베란다 창고로 가 몸을 뒤적였다. 물고기를 키운 어항의 흔적이 있었다. 하지만 엄지손톱보다도 작은 녀석을 담기엔 너무 컸다. 아무래도 예전의 곤충통은 버렸나 싶다. 다시 부엌으로 와 사용하지 않는 통을 찾아 헤맸다. 마땅한 게 없다 싶을 무렵, 예전에 딸이 학교에서 방과 후 요리수업때 하던 통을 몇 개 남겨둔 것이 생각났다. 손을 깊숙이 뻗어 네모난 죽통처럼 생긴 투명한 통 하나를 꺼냈다.

송곳으로 뚜껑에 구멍을 여러 개 냈다. 그래도 숨은 쉬어야 하지 않겠는가. 함께 온 상추를 두어 개 통에 넣었다. 그리고 딱 붙어있는 달팽이를 손으로 떼었다. 그릇에 붙어있으려는 듯 달팽이는 용을 쓰고 안 떨어지려 했다. 미세한 근육의 힘이 느껴졌다. 그래도 사람의 힘을 당해내겠는가. 조금 더 힘을 주어 달팽이집을 붙잡고 당겼다. 통에 넣었다. 투명하지 않은 몸이었지만 몸 안으로 쏙 들어간 검은 더듬이 같은 눈이 보였다. 겁 나는 게 당연하겠지. 자신의 힘보다 엄청 큰 힘을 가진 이상하게 생긴 무언가가 자신의 힘을 맞서 움직이고 다른 곳에 떨어뜨려놨으니 얼마나 무서웠을까. 게다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요상한 하얀 세상 속에 버려둔 게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릴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바닥에 키친타월을 깔아 물을 부어두었으니 달팽이의 피부가 말라죽을 일은 없으리라. 상추도 먹겠지.

하루가 지나는 동안 달팽이는 몸을 움츠리고 꿈쩍하지 않았다. 상추를 먹은 흔적도 없었다. 계속 눈길이 갔다. 달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제발 먹어줬으면 하고 기도했다. 만 하루가 지나고 아침 통에 검은 무언가 보였다. 귀퉁이에 달팽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봤다. 통 안의 벽에 똥을 쌌다. 멀미를 했구나. 비행기를 타고 어딘가 가는 나를 상상했다. 밖을 나가서는 변도 잘 보지 않았다. 이틀이 지나도 뱃속은 긴장상태였다. 집에 돌아와서야 편히 큰일을 볼 수 있었다. 적응하느라 고생했다. 그 뒤로 상추를 뜯어먹는 달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며칠이 지나고 집청소를 했다. 뚜껑을 열고 달이를 바라봤다. 흐물흐물한 것 같은 달이의 몸에 상추먹이가 들어가고 배설물이 되어 나오는 모습이 투명하게 비쳤다. 이런 생명체가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니 신비스럽다. 입모양은 또 어떠한가. 외계인으로 상상하는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입모양이 아니던가.

지금은 상추아래에서 잠을 잔다. 계란껍데기가루를 먹으면 달팽이의 집이 단단해진다고 해서 한구석에 넣어주었다. 아무리 살기 좋게 만들어주고 가족과 같이 살자고 외친 들, 달팽이는 아마도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난 그저 나로 살고 싶을 뿐이야. 너희들이 나의 가족이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아?라고. 언젠가 시골에 갈 때 풀밭에 놓아준다고 한들 그것은 또 그의 집일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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