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는 입이 작다. 작은 체구로 말을 한다고 한들 우리 귀에 들리지 않을 게 분명하다. 자그마한 입으로는 그저 먹고, 옆으로 쌀 뿐이다. 먹을 때만 입을 연다. 티도 나지 않는 이빨로 상추 한 조각을 문다. 자세히 보아야 씹은 자국이 보인다. 조금만 물고 가버렸다면 모를 일이다. 문제는 먹이를 주야장천 깨물어대는 데 있다.
그는 끈기가 있다. 오래 한곳에 머무른다. 이파리가 남아나지 않도록 그 자리에서 자신의 배고픔을 해결한다. 상추밭에 출몰이라도 하면 상추를 초토화한다. 배추밭에 배추벌레 못지않다. 땅이 조금이라도 습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달팽이는 초록 작물로 올라온다. 인간들이 정성을 다해 키운 채소를 맛이라도 봐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함께 사는 사회구성원이라는 듯 그는 인간의 눈에 띈다.
인간들은 농작물에 애정을 쏟는다. 겨울에는 거름을 섞고, 봄이 되면 비료를 주고, 여름에 병충해 약을 뿌린다. 여름내 한참 동안 배추밭에 앉아있는 엄마를 보았다. 달팽이가 붙어서 손으로 떼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일일이 떼어 죽이고 있었다. 이 상태라면 배추를 먹을 수 없다고 어쩔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
인간은 먹고살아야 한다. 인간은 약으로 더 이상 해결되지 않는 것을 알고 달팽이를 집어낸다. 먹을 수 없도록 인간과 너희는 다르다는 걸 정확하게 인지시킨다. 그들이 죽는 것은 슬프지만, 인간도 먹고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달팽이는 모진 핍박과 억압 속에서도 살아야 한다. 인간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을 테지만, 그러지 않는다. 갑자기 머릿속에 인간을 설득하려는 달팽이의 모습이 그려진다.
말을 하는 달팽이라니, 상상만 해도 우습지 않은가. 그 조그만 입에서 또박또박하고 싶은 말을 한다니. 아니면 목소리가 체구보다 훨씬 커서 의미를 전하는 것을 넘어서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현실과는 괴리가 있다. 자기 의사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동물이라도 있다면 인간의 삶은 분명 달라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습기만 한 상황은 아닐지도 모른다.
애니메이션 영화 <업 Up>에는 주인공의 개가 통역기를 목에 걸고 나온다. 동물과의 소통을 원하는 인간의 생각이 반영된 영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동물로 살아가면서 인간과 무얼 말하고 싶은지 동물로서도 답답할 수 있다. 인간만 답답한 건 아닐 수 있다. 인간조차도 말이 통하지 않는 전 세계인과의 통역이 중요시되고, 휴대전화의 통역 기능이 중요해지고 있지 않은가. 소통은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필요한 방법이리라.
달팽이가 보이는 투명한 벽을 향해 말한다. 자의든 타의든 너는 나를 이곳에 가두었다. 이렇게 보이는 나의 삶이 정녕 행복해 보이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행복은 너의 입장이지 않을까. 나를 돌봄으로써 너의 마음을 조금은 선함으로 변화시키려는 욕심이 아니냔 말이다. 나의 걸음이, 나의 목소리가 소소하기만 하다 하여서 없는 것은 아니다. 눈이 달린 더듬이 두 개가 나를 향해 지긋이 노려본다.
미안하다. 내가 전능한 신이 되려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너의 먹는 것과 생활하는 모든 것을 관장하려 일부러 욕심을 부린 것은 절대 아니다. 그 점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입을 벌려 말하는 것은 아니나, 오래도록 보고 있자니 나는 그의 목소리를 느낀다. 그런 사람도 있지 않은가. 함께 앉아있으면 말을 많이 하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그대로 목소리로 내뱉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몇 마디 하지 않아도 분위기로 그 사람을 파악하고 의도를 알아채기도 하는 사람이 있다. 어쩌면 그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자의 행동 하나로도 충분히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달팽이와 교감한다.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았다고 화를 내고, 잔소리를 내뱉은 일에 대해 나에게 사과한다. 말이 많으면 그만큼 나를 깎아 먹는다. 자리를 잠시 떠나 기분을 가라앉히고, 짧은 대화로 내 의사를 밝히면 된다. 잔소리가 잔소리로 들리지 않도록 더욱 조심히 입을 놀린다.
달팽이는 말하지 않는다. 그저 작은 입으로 먹으며 나아간다. 그저 본인이 가야 할 곳을 가고, 해야 할 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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