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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승유 아빠 Jul 04. 2022

잔상 1

어떤 남자와 흔적들

오늘 그녀는 부쩍 나이가 들어 보였다.

사실 오늘 아침 세면을 위해 거울 앞에 설 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녀의 모습이 변한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녀는 평소처럼 나의 약간 뒤편에 서 있었고, 나는 평소처럼 그녀를 잊어야 한다는 생각에 그 잔상을 외면하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나의 모습을 외면하는 것이었지만. 사실 나의 신체는 표면적으로 구별할 수 있을만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장애를. 오른팔은 고온에 의해 손상 입어 제대로 펴지지 않았고, 왼쪽 무릎은 충격에 의해서 자기 기능을 다 할 수 없게 되었다. 그에 비하면 얼굴은 멀쩡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화상의 흔적이 남아 있는 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주말 동안 수염은 덥수룩해져 있었고, 제대로 잠들지 못한 눈동자는 충혈되어 있었다. 얼굴은 날이 갈수록 말라갔는데, 그래서 그런지 나는 필요 이상으로 늘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그녀의 잔상이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면도기를 내려놓고 얼굴을 닦 내던 중이었다. 그녀는 늘 청바지에 노란 스웨터를 입고 있었고, 단발머리였다. 얼굴에는 스무 살이 가진 특유의 명랑함이 묻어났는데, 어떤 이유에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약간의 그늘을 감추고 있었다. 눈썹은 예쁘지 않았다. 폭이 좁고 가는 눈썹이었는데, 얼굴이 작기 때문인지 어색하지는 않았다. 눈은 작지만 동그랗고 끝이 약간 찢어져서 열 시와 두 시 방향으로 치켜 올라가 있었다. 눈꼬리는 늘 웃고 있는데, 크게 웃고 있지는 않았다. 코는 크지 않고 끝이 동그랬는데, 늘 코 수술을 하고 싶어 했다. 입은 크지 않았고, 입술도 두껍지 않아서 마치 선으로 그려놓은 것 같았는데 이는 보이지 않았다. 왜 늘 이가 보이지 않는 걸까 궁금해했지만 이제 물어볼 수도 없었다.


처음 거울 뒤에 그녀가 나타난 것은 교통사고가 난 직후였다. 거울 뒤에 그녀는 서 있었다. 의식을 찾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고, 진통제와 항생제와 내가 모르는 수많은 약들에 취한 상태였으므로 나는 헛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처음에는 그녀가 서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바로 뒤편에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하지만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봐도, 거울 이쪽 편에는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오직 나뿐이었다. 다시 거울을 보았을 때, 그녀는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거기 서 있었다. 하지만 나는 혼자였다. 물리적으로. 거의 완벽하게. 사실 그때 아버지는 중환자실에, 어머니는 영안실에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소재는 알 수 없었다. 우리는 그때 아주 멀리 떠나온 중이었다. 서울에서 인천으로, 다시 배를 타고 제주항으로, 다시 차를 타고 서귀포로 가는 중이었다. 비는 많이 내렸고, 이상하게도 아버지는 휘청거렸다. 아버지는 산을 따라 비틀거리며 운전하고 있었고, 비는 갈수록 많이 내렸다. 바람은 불고, 우리는 짐도 별로 없이 비틀거리는 차를 타고 산길을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무척 피곤했고, 차 안은 서울에서는 알 수 없는 습기로 가득 차 있었다. 어머니는 제주도에서 새 출발하자고 말하고 있었고, 스무살년이었던 나는 그 그득한 습기 속에서 잠깐, 아주 잠깐 졸았다. 그리고 아버지도 그런 모양이었다.


19년 전, 그녀의 잔상이 내 거울 속에 처음 나타난 날부터 그녀는 늘 한결같았다. 옷차림도, 웃음도, 약간의 슬픔도. 아마 그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녀의 생각을 하지 않으면 곧 희미해지다가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나는 곧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곤 했다.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러면 그녀의 잔상은 곧 힘을 얻어서 다시 얼마간 나의 거울 속에 머물게 되는 것이었다. 그녀 외에도 수많은 잔상이 나의 거울에 머물다 갔지만 그토록 오래도록 머물러 있는 것은 그녀뿐이었다.


면도를 마치고 문득 거울을 바라보았을 때, 그녀의 잔상이 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단발이었던 머리가 길어져 있었다. 그 긴 머리는 뒤로 묶여 있었고, 얼굴은 조금 더 나이 들어 보였다. 눈썹은 문신을 한 것인지 화장을 한 것인지 짙어져 있었고, 찢어져 올라간 눈꼬리는 아래로 많이 내려와 있었다. 코와 입은 그대로였지만, 웃을 듯 말 듯했던 입은 웃음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피부는 탄력을 잃어가고 있는지 약간 아래로 쳐지고 있었는데, 그래도 더 나이가 들어 보이지는 않았다. 손은 주름 쳐 있었고, 아주 조금 흰머리가 보였다. 딱 사십 살쯤 여자의 모습이었다. 면도기를 손에 든 채,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19년 전 헤어졌던 그녀가 주변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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