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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승유 아빠 Sep 20. 2022

잔상 5

어떤 남자와 흔적들

"베트남에 산 적이 있어서요. 하노이 어딘가에요."

웃는 얼굴로 손님에게 답하는 여주인의 얼굴을 보며, 준서는 참 맑은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지쳐있기는 했지만 아직 삶의 희망을 버리지 않는, 그래서 누구에게나 진심으로 힘내라고 말해줄 수 있는. 여주인이 다른 곳으로 몸을 돌려 이동하기 전에 준서는 고개를 숙이고 다시 먹는 일에 집중했다. 아주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럭저럭 먹을만한 맛이었다. 이따금 바다를 바라보면서 그는 여주인에 대해 생각했다. 


이은주, 40세, 기혼, 자녀 없음. 

준서는 은주가 베트남에 산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남편을 떠나서 베트남에서부터 도망쳐 온 것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썩 호감형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비호감형도 아니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중년의 남자. 예전에는 나름 이해심도 호승심도 가진 적이 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본연의 나약함을 보이는, 대한민국 어디에서든 쉽게 찾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부인을 때렸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 아마 그런 욕망을 가지고 있었거나, 성장 중에 그런 종류의 학대를 경험한 적이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아마 처음부터 그런 욕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었다. 선천적으로 그런 욕망을 가지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통계적 사실과, 연신 땀을 흘리며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는 그의 태도는 그의 욕망이 아마도 학습에서 비롯되었다는 것과 그의 욕망의 격이 상당히 낮다는 확신을 가지게 했다. 아마 폭력이나 학대 혹은 둘 다, 혹은 정서적 학대를 경험했을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양육태도나 배우자에 대한 태도를 학습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 처음에는 다정다감했을 것이고, 섬세한 남자로 보였을 것이지만, 경제적 상황과 부부관계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면서부터 자신 본연의 욕망에서 눈을 뜬 것처럼 보였다. 

몇 번 때리지 않았다고, 아마 한 번이나 두 번이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그가 자신의 행동을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할 때부터 생각보다 오래전부터 점차적으로 아내에 대한 학대가 진행되어 간 듯했다. 어쩌면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유일한 행운이랄까. 아마 아이에 대한 양육태도도 유사하게 변질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경제적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면 혹은 아내가 자신의 통제에 잘 따라주거나 자신의 정체성 혹은 욕망에 대해 늦게 눈치챘다면 폭력이나 학대의 형태가 발전되거나 발현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높았다. 하지만 이미 그는 욕망에 눈을 떴고, 아내와의 관계도 개선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이야기하면서 신혼 때, 아니 연애할 때부터 아내의 잘못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은연중에 인식하고 있으나 계속해서 자기 합리화를 진행하고 책임을 타인에게 미루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그의 행동이나 생각이 발전이나 개선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고, 어지간해서는 그의 의뢰가 취소될 여지가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 동안 이야기했고, 준서는 상당한 인내심을 가지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어쨌거나 그는 고객이었으므로. 한참의 푸념 끝에 남은 감정은 여전히 분노였다. 그는 결혼 후 아내의 동의 없이 베트남으로 이주를 계획했고 사업을 진행했으며, 아내의 동의 없이 사업 확장을 시도했고, 아내의 의견을 묻지 않고 시댁에 대한 일방적인 복종관계를 요구했다. 그리고 일반적이지 않은 성적인 취향을 지속적으로 요구했지만 그의 아내는 그의 의견을 무시했다. 그래서 그 불복종의 대가로 그는 아내의 생활비를 줄였고, 아내 앞으로 들어둔 보험을, 생명보험을 제외하고는 모두 취소했으며, 처가에 대한 아주 적은 금액이기는 했지만 지원을 중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통제에 따르지 않자 그는 수년 동안 아내를 정서적, 육체적으로 학대했으며 결국 그녀는 작년에 남편 몰래 베트남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준서는 이해했다. 물론 실제 대화 내용은 이것보다 훨씬 길고 지루하고 기분이 좋지 않아서 준서는 인내심을 잃을 뻔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위로의 몇 마디도 덧붙였고, 그녀의 생명보험이 더 늘어났다는 것과 금액이 상당히 크다는 것까지 듣고는 기분이 조금 좋아지기까지도 했다. 그녀의 남편은 여전히 아내를 사랑하고 있으며, 아내에게 모든 것을 잘해주었는데 아내가 자신을 배신한 사실에 대해 몹시 분노했다. 물론 그가 아내에게 베푼 것은 아내의 욕망은 아니었고, 스스로의 욕망이었으며, 일방적인 욕망에 대가로 남은 분노의 불합리함과 저열함과 비열함을 준서는 잘 알고 있었지만, 그는 한 마디도 충고하지 않았다. 단지 아주 정확한 숫자로 자신이 필요한 것들과 필요한 기간과 금액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의뢰는 무조건 선입금이 조건이며 의뢰를 실행하지 못하게 된다 해도 돈은 돌려주지 않는다는 점과 하지만 의뢰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리고 의뢰의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자신의 신상이나 만남과 관련된 정보가 어떤 종류의 정보로든 가공되거나 아니면 가공되지 않은 찌라시의 형태로라도 유통된다는 사실을 자신이 알게 된다면 그 정보의 출처를 찾아서, 그게 한 명이든 아니면 조금 많은 인원이든 전혀 상관없이 신체 어딘가에 위해를, 생명을 잃을 정도의 위해를 가하겠다는 설명도 아주 친절하게 마무리했다. 그녀의 남편은 에어컨이 틀어져있는 차 안에서 연신 땀을 흘리며 준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채 알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리고 그가 보는 앞에서 의뢰 비용을 현금으로 지불하고 차를 몰고 사라졌다. 준서는 둘이 만난 곳에서부터 평범한 등산 복장으로 산길을 한참을 걸어 자신의 차가 있는 곳까지 걸어왔다. 마음 편하게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를 예약했다. 사실 그는 돈을 받았고, 그의 흔적도, 타액이나 터럭 하나라도 남기지 않았으므로 의뢰를 실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떤 강제력의 영향도 받지 않을 터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주도로 향할 터였다. 그건 준서가 늘 차분하고 책임감이 강하며 자신의 일을 즐겨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준서는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한 후 베트남 음식점을 나섰다. 은주의 목덜미는 희고, 표정은 차분해 보였다. 손은 다소 주름졌으나 젊은 여성의 손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웃고 있지만 어딘가 내적 갈등을 다 풀어내지 못한 표정으로 거스름돈을 건네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 애처로워서 하마터면 준서는 그녀에게 말을 걸 뻔했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그는 인내심을 지닌 전문가이므로. 먼저 그녀의 집을 알아내야 하고, 주변의 보안 상황이나 CCTV를 살펴야 했으며 그녀의 이웃들이나 그녀가 만나는 사람을 살피고, 그녀의 생활 동선을 알아내야 했다. 언제 일어나서 무엇을 하며, 어디에서 자는지, 무엇을 하는지, 언제 먹고, 언제 잠드는지. 그리고 모든 것을 알아내었을 때, 그리고 충분한 연습이 진행되었을 때, 완벽한 상황이 조성되었을 때, 그녀와 나 단 둘이서, 그녀의 남편이 지닌 그런 설익은 폭력이 아닌, 상당히 다듬어지고 절제된 폭력성을,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단 한 번 밖에 볼 수 없는 바로 그것을 보여줄 기회가 올 것이었다. 그녀의 흰 목덜미를 다시 한번 바라보며 준서는 식당을 나섰다. 


그리고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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