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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승유 아빠 Sep 27. 2022

진상 6

어떤 남자와 흔적들

서귀포의 여름 바다는 생각보다 아름답지 않다. 물론 봄과 가을 해안가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휴양지의 바다, 그것이지만 막 여름에 접어드는 장마철의 서귀포는 휴양지의 바다와는 많이 다른 모습을 갖고 있다. 물론 예전에 비해서는 장마라고 해서 비가 많이 내리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 서귀포에 살 때만 해도 장마 내내 쏟아지는 비 때문에 집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사고가 나고 얼마 뒤라서 몸은 불편했고, 우산도 제대로 들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먹을 것을 사야 했기 때문에 비옷을 여미고 밖으로 나가기도 했지만, 다리를 절고 밖을 돌아다니다 보면 자주 넘어지곤 했었다. 어떤 날은 넘어지지는 않았는데, 너무 거센 빗줄기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는데, 손과 팔 가득 퍼져 있는 흉터를 보고, 다시 그 흉터가 가득한 팔로 얼굴과 머리의 흉터를 쓸어내리며 한참을 빗속에 서 있었다. 어느 해에는 비가 너무 내려서 모든 것들이 비와 함께 사라져 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루 종일 밖에 나가지도 않았고, 창문을 굳게 닫고 있었는데, 초여름의 습기와 열기 때문에 집안은 찜통처럼 훈훈했다. 베란다에 접해 있는 유리에 얼굴을 기대고 앉아 있었는데, 빗줄기가 연신 유리창에 와서 닿았다. 비가 너무 와서 바다에 접해 있는 이딴 낡은 빌라 따위, 금세 바다와 함께 가라앉아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제주도는 그 많은 비를 모두 수용하고 있었다. 장마와 장마 사이, 잠시 나타난 햇볕만으로도 바닥은 마르고,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밖으로 나와 드문드문 돌아다녔다. 비가 그친 사이,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지 않는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다. 어떻게 그 많은 빗물들을 받아들이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어느 날부터인가, 흉터를 드러내고 밖을 다녀도 사람들이 쳐다보지 않게 된 때까지, 어느 정도 내리는 비는 비옷도 우산도 없이 다리를 조금 절며 다닐 때까지 나는 늘 그것이 궁금했다. 제주도라는 섬의 품이 궁금했다. 검색을 해보기도 하고, 서귀포 시내에 도서관에 가서 자료를 들여다 보기도 했지만, 여러 번의 화산 분출과 여러 번의 빙하기를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는 정보뿐, 섬이 가진 내면의 정보를 알 수는 없었다. 하긴, 섬의 내면이라니. 내가 정말 궁금한 것은 섬이 가진 내면이 아닐지도 몰랐다. 


올 해는 방에 거울을 달 수 있었다. 비가 많이 내리지는 않았기 때문에 우산을 늘 집에 놓고 다녔다. 비는 많이 오지 않았지만 습도는 늘 높았다. 아침에 창문을 열면 바다에서부터 뜨거운 공기와 안개가 몰려 들어왔다. 늘 빨래는 마르지 않았고, 이불은 늘 눅눅했다. 몸이 나아지기 전까지, 집에서는 늘 곰팡이 냄새가 났다. 옷장이나 이불에 핀 곰팡이들은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었는데, 천장이나 천장 모서리에 핀 곰팡이는 해결할 수가 없었다. 의자를 놓고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균형을 잡을 수도 없었고, 의자 위에 어떻게든 올라가도 팔을 뻗을 수가 없었다. 흉터가 심한 팔은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점차 움직이지 않았고, 점점 야윈 것처럼 얇게 변해갔다. 근육이 빠져서 더 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팔과 점점 달라져 갔고, 내 것이지만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팔을 뻗을 때마다 흉터가 곰팡이처럼 보여서 혼자 있어도 흉터를 가리고 있었다. 몸이 좀 나아지게 되면서는 늘 곰팡이와의 싸움이었다. 벽지를 바꾸고, 이불을 바꾸고, 닦고, 감시했다. 여전히 흉터는 팔이며 얼굴 한 편에 퍼져 있었지만 곰팡이는 없었다. 적어도 내가 볼 수 있는 곳에는 그랬다. 


그녀의 식당 앞은 바다였고, 습기는 그녀를 찾을 것이므로 그녀의 가게 어딘가에도 곰팡이가 있을 것이었다. 그녀를 찾아가서 그 사실을 이야기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녀가 나를 바라볼 것이고, 그녀가 나를 알아본다면 나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아마도 내가 그녀에게 잘못한 것은 없었지만, 나의 팔과 다리와 얼굴과 쪼그라진 몸짓은 그녀를 당황하게 할 것이고, 나는 그녀에게 이것들을 설명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 앞에 설 수는 없었다. 아니, 사실 내가 정말 두려운 것은 그녀가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녀가 알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흉터와 자세와 어눌해진 말투가 그녀에게는 초여름이면 잔뜩 내리는 습기와 곰팡이처럼 느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몇 번이나 망설였지만 결국 그녀의 식당에 들어설 수는 없었다. 


하지만 멀리 갈 수 없었다. 방금 전 그녀의 공간에서 머물고 있던 것은 분명한 악의였다. 오전에 비가 내렸는지 거리는 군데군데 젖어있었다. 그녀가 있는 건물 바로 앞 방파제에 앉아서 바다를 향해 앉아 있었다. 몇몇 동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바다를 향했는데, 해가 구름 사이로 잠깐 나왔다. 해에 노출된 온몸이 데워져 땀이 배어 나왔지만, 그대로 있었다. 잠시지만 해가 습기를 몰아내고 방파제를 말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선은 바다를 향하고 있었지만 모든 감각은 등 뒤를 향하고 있었다. 찐득하게 느껴지는 악의가 그녀의 식당에서 아래로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정돈된 악의였기 때문에 나는 좀처럼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차분하게 정돈된 것과는 반대로 손으로 만져질 것처럼 찐득한 악의가 순식간에 나를 덮쳐올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악의는 일층으로 내려와 멀리 그리고 서서히 사라져 갔지만 나는 그 악의가 향한 곳이 어디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아주 오래된 육식동물이 사냥 전에 살기를 숨기는 것처럼, 깊은 바닷속에 살고 있는 미지의 생물이 날카로운 발톱을 품에 숨기고 심해에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피부를 저리게 할 정도로 강렬한 악의와 살의가 그녀를 향해 있었다. 나는 두려움을 숨기며 고개를 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잔상을 머릿속에 갈무리해야 했다. 나는 비록 여기저기 다친 초식동물이지만, 그 악의를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와 잠시 눈을 마주쳤지만 그는 나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고, 나는 그의 잔상을 언제라도 꺼낼 수 있도록 깊게 새겨 넣었다. 그의 평범한 모습과 그 모습 속에 숨겨진 폭발적인 악의를, 검은 그림자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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