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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승유 아빠 Oct 12. 2022

잔상 8

어떤 남자의 흔적들

내가 잠시 숨을 고르는 동안 그는 골목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나는 조바심 내지 않았다. 낮게 지은 구옥들 너머로 그의 악의가 안개처럼 깔린 채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의 불편한 다리로는 그를 따라갈 수가 없다는 것은 이미 예상한 바였다. 아주 오랜 노력 끝에 약간의 불편함을 제외하고는 예전과 가까운 상태로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예전처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예전처럼 움직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를 따라가는 것은 무리였다. 나는 체구가 큰 것도 아니고 운동을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적당히 평범한 사람, 그다지 착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그게 나였다.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선량한, 보통사람의 기준에서 더하거나 덜하지 않은. 사고를 당하기 전에도 누군가를 힘으로 이겨보거나, 누군가와 격렬하게 육체적으로 겨뤄본 적이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물론 사춘기의 상상 속에서, 육체적으로 우수하거나 이상한 매력을 가진 사람이 되어 본 적이 있었지만 현실에서 그런 일들은 무리였다. 나는 대체로 마른 편이었는데, 운동을 해도 좀처럼 근육이 생기거나 하지 않았다. 열 살인가, 잠시 태권도 학원을 다닌 적이 있었다. 일품이 되기 전까지 곧잘 다녔는데, 직전에 그만두었다. 그 전 주에 겨루기가 있었다. 상대는 근처에 사는 아이였는데, 키도 크고 운동도 잘하는, 나와는 상당히 다른 아이였다. 겨루기를 시작하고 한 오초만에 나는 누워있었다. 두 차례 더 일어나서 맞섰는데, 그 아이의 발에 가슴을 맞는 그 느낌을 잊을 수가 없었다. 사실 그때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건 공포심이었다. 육체에 가해지는 폭력에 대한 공포심. 그건 겨루기라는 정해진 규칙 속에서 일어나는 폭력이었고, 그 안에서 나는 보호받을 수 없다고 느껴졌다. 주말 내내 그 기억을 지우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그다음 주에는 태권도 도장에 갈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두려웠고, 그 아이를 마주 볼 수 없었다. 정확하게는 그 아이에게 내 공포심을 들킬 것 같았다. 


그는 마치 안개처럼 움직였다. 걸음소리도 거의 나지 않았고, 비도 조금씩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움직이는 속도도 매우 빨라서 나는 들키지 않기 위해 움직였지만 그와의 거리는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며칠 동안 점점 커진 그의 악의는 이제 낮은 지붕 위로 보일만큼 커져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를 손쉽게 찾을 수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그는 은주의 곁을 맴돌았다. 은주가 있는 장소에 있었던 것은 첫 날 뿐이었고, 그다음 날부터는 거리를 두었는데 아마 그도 매우 조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퇴근하고 돌아와 보면 그의 악의는 어김없이 건물 근처를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점차 늦은 시간까지 머물러 있었는데, 나중에는 은주의 퇴근길을 쫒고 있었다. 은주는 아홉 시가 조금 못되면 건물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집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에 걸어가곤 했는데, 그러면 그는 어디선가 그림자처럼 나타나 그 뒤를 따라갔다. 그는 아주 평범한 복장을 하고 어딘가에 섞여 있었다. 어떤 날은 부두 근처에 낚시꾼처럼 앉아 있기도 했고, 어떤 날은 편의점 앞에 취객들 사이에 섞여 있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날은 골목 어귀에서 갑자기 나타나기도 했는데, 그날 나는 그에게 내 모습을 노출할 뻔했다. 나는 그가 있는 곳을 정확해 알고 있었다. 그의 잔상을 인식한 이후부터 나는 그를 잊지 않으려고 애썼기 때문에 어쩌면 누구보다도 그를 잘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에 띄지 않아도 그가 있는 곳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언제나 상당한 거리를 두고 그를 관찰할 수 있었다. 그의 악의는 점차 커져갔는데, 날카롭게 손질한 칼날처럼 은주의 약하고 흐릿한 기운을 늘 노리고 있었다. 내가 잔상을 본 이후로 그렇게 뚜렷하고 방향성을 지닌 악의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따금 불순한 의도를 가진 사람을 보는 경우도 있지만 그들 모두 뿌연 즉, 형체를 지니지 못한 상태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오래 관찰해보면 그런 의지들은 흔적만을 남기고 사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즉 실행까지 가지 못한 단순한 혹은 불순한 의지, 그것이었다. 나에게 느껴진다는 것은 그런 의지들이 작지 않은 것임을 의미하였지만, 그래도 그 의지가 누군가를 직접 해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의지는 달랐다. 그는 처음에 은주의 집 골목 어귀까지 따라가는 것 같았다. 큰길에서 골목에 이르는 곳에서 한참 멈춰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더 깊은 골목 속으로 들어갔고, 그다음에는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는 점차 은주에게 가까워지는 것이 분명했다. 의도는 알 수 없었지만 단숨에 다가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차근차근 어떤 절차를 밟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거의 다 자신이 원하는 위치에 도달했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의 악의가 이제는 주변 풍경을 가릴 정도로 분명하게 형체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그의 모발이 사라졌다. 그는 모발을 완전히 제거했고, 팔의 털이나 수염도 제거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울 속의 그는 이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골목 뒤를 돌아 사라진 그를 따라 길을 걷던 나는 그가 더 깊숙한 곳, 은주의 집 안으로 들어간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악의는 안개처럼 깔려 있었고, 아주 굳게 머물고 있었는데,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육식동물이 사냥을 하기 전에 먹잇감을 노리는 것처럼, 그는 웅크리고 있었다. 은주의 집은 오래된 구옥이었다. 내부는 알 수 없었지만 작은 마당 안으로 낮은 높이의 지붕이 있었고, 작은 창에는 불이 켜져 있었는데, 그 창 아래 어딘가에 그가 숨어 있었다. 나는 며칠 동안 다리를 혹사시킨 덕에 다리가 몹시 아팠는데, 나도 모르게 다리를 절고 있었다. 처음에는 집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있었는데 점차 나도 모르게 은주의 집 앞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어둠 속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음과 은주가 그것을 모른 채 집안에 머물러 있음도 알았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골목에는 CCTV도, 도움받을 수 있는 어떤 것도 찾을 수 없었다. 즉, 은주는 아무런 보호 없이 자신의 바로 곁에 악의가 머물러 있음도 알지 못한 채,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집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었다. 나는 대문을 조금 지난 시점에 잠시 발을 멈추었다. 당장 안으로 들어가서 그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오거나, 아니면 그를 어떻게든 제압해서 그녀를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며 그녀에게는 지금 곁에 머물고 있는 위험보다 내가 더 두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움직임으로 보았을 때 나보다 훨씬 육체적인 면에서 우세할 그를 뚫고 내가 그녀에게 이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그녀에게 신호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던 그때, 그의 악의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시선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시선보다 더 직관적인 무엇이었다. 내가 악의를 보듯이 악의 또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악의와 나 사이에 물리적인 장애물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악의와 내가 서로 마주 볼 때, 나는 악의마저도 잔상을 남길 수 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그의 악의가 아주 뚜렷한 적개심을 가지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누가 봐도 의지를 가진 무엇이었다. 그것이 원래 스스로 존재하다가 그에게 다가간 것인지 아니면 그에게부터 생겨나서 의지를 갖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나를 직관하고 인식하고 적개심을 품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원색적인 적개심 앞에서 나는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악의가 지닌 적개심이 촉수처럼 나에게 뻗어져 오는 것을 그냥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적개심이 거의 나에게 와닿았을 때, 그가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서둘러 더 골목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의 다리 끌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졌고, 걸음을 서두르며 내는 소음들이 더 크게 들렸다. 지금까지 중 나는 그와 가장 가까이 있었고, 그의 악의와도 그랬다. 그가 나를 쫓아올 것임을 나는 알 수 있었다. 가능하다면 그를 제압하면 좋겠지만, 나는 겁에 질려 있었다. 공포나 두려움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겁.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공포심. 나의 직관 속에 그는 이미 수 차례 사냥을 성공적으로 끝낸 육식동물이었다. 그리고 그의 악의가 직관한 나는 '나'였다. 어떤 꾸밈도 허세도 없는 나를 나는 그대로 노출해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악의가 나를 쫓고 있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나는 비옷이 비벼지며 내는 소음과 다리 끄는 소리를 내며, 가능하다면 동네 사는 누군가가 집에 서둘러 가는 것으로 그가 착각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골목 안쪽에 문에 열린 곳으로 들어가자마자 문 뒤편에 쓰러지듯 주저앉아버렸다. 


바로 문 너머에 그와 그의 악의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긴장감에 호흡이 거칠어졌고, 오랜만에 속도를 낸 다리는 부들거리며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다행히 빗줄기가 굵어졌고, 빗방울이 낮은 슬레이트 지붕 위로 떨어지는 소리가 나의 거친 숨소리를 가려주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문을 지나가지 않았다. 바로 내가 있는 문 뒤에 서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참을성 있게 나를 찾고 있었다. 아니, 그의 악의가 나를 찾고 있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그의 잔상을 없애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내가 은주의 집 앞에 머물렀을 때, 나는 너무 악의 가까이 머물렀던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나만이 잔상을 보고 느낀다고 생각했는데, 나만이 사람들의 악의나 감정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떤 종류의 강렬한 감정은 오히려 거꾸로 나를 인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내가 그들을 끌어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너무 많은 잔상 때문에 거울이 없는 곳에 혼자 있을 때, 나는 그 많은 잔상들을 사라지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은 강력한 의지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그것을 보려는 의지를 버리고 긴장을 완전하게 풀어버린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의 악의가 나를 보지 못하도록 그 상태에 이르러야 했다. 

하지만, 나는 지나치게 지쳐 있었고, 그의 악의는 분명히 나를 직관했으며, 나는 겁에 질려 있었다. 그의 악의는 점차 내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머리 위를 보니 그의 악의가 마치 칼의 모양을 하고 문을 넘어오려고 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냥 평범한 칼이었는데 흔히 부엌에서 쓰는 그런 모양이었다. 그리고 악의가 모습을 어느 정도 나타냈을 때, 그의 손이 문을 잡고, 문을 밀어 열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나는 바로 문 뒤에 있었고, 힘 없이 쓰러져 있었기 때문에 그가 문을 밀고 들어온다면 그와, 그 악의와 바로 마주치게 될 것이었다. 

그의 손이 문을 밀려고 하는 순간 집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순규냐?" 


그리고 방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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