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승유 아빠 Oct 05. 2022

잔상 7

어떤 남자와 흔적들

일단, 몸에 있는 털이란 털은 다 밀어야 한다. 왁싱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준서는 선호하지 않았다. 일단 흔적이 남는다는 것, 그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왁싱을 위해서는 샵을 방문해야 하고 비용을 지불하고 매장을 드나드는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게 흔적이 남게 된다. 물론 매장은 그의 직업 혹은 범죄와 관련이 없는 곳이지만, 그는 자신의 모습을 어디에도 남기고 싶어 하지 않았다. 두 번째 이유는, 헐벗은 상태에서 타인 앞에 서고 싶지 않았다. 그는 학업을 마친 이후, 그 누구 앞에서도 알몸으로 혹은 무방비 상태로 자신의 몸을 맡기지 않았다. 그 누구에게도 어떤 방식으로도 무방비의 몸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맹세했으므로. 그 집을 나온 다음부터 그렇게 맹세했다. 어떤 방식의 폭력이건, 어떤 방식의 손짓이건, 어떤 방식의 접촉이건 수동적인 조건에서 비롯한 일체의 접촉을 허락하지 않겠노라고. 그를 보호하는 것은 한시도 방심하지 않는 굳은 마음뿐이었다. 아주 어린 때부터 그는 폭력에 노출되었고, 그를 보호해 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머니라는 존재는 이미 아주 오래전, 준서가 기억도 할 수 없는 어릴 때, 남편의 폭력을 피해 어디론가 사라졌고, 그녀를 찾지 못한 폭력은 어린 아들을 향했다. 실상 그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학교를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는 거의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폭력의 주체였던 그의 아버지는 외출할 때, 문을 밖에서 잠갔고, 냉장고에는 최소한의 음식물만 남겨두었다. 반지하 방에서 그는 하루 종일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발을 보며 시간을 보냈고,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학교를 다녀야 할 때부터는 멍이 들지 않도록 맞았는데, 강목에 수건을 감고 맞기도 했고, 멍이 들지 않도록 머리를 가격 당하기도 했다. 직접적인 폭력이 가해지지 않는 날에는 기합을 받거나 추위나 더위에 노출되기도 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어떤 미학이나 규칙을 가진 것이 아니고, 자신의 분노를 그저 분출할 뿐이었다. 이따금 동거녀들이 집에 머물렀는데, 준서가 아주 어릴 때는 그녀들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내보기도 하고, 잘 보이려고 노력해보기도 했지만, 돌아온 것은 경계와 무관심뿐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녀들은 두려웠을 뿐이었다. 그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혹시 자신들에게 향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수많은 폭력 속에서도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는 괴물 같은 아이에 대한 두려움. 준서는 점차 폭력에 둔감해져 갔고, 점차 변해갔다. 폭력의 대상이 아니라 폭력의 주체로. 그리고 어느 순간 그의 아버지는 그것을 눈치챘고, 준서에게 폭력을 가하지 않았다. 준서의 폭력은 아버지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 그 폭력은 처음에는 주변에 향했는데, 점차 내면의 분노가 커지고 있음을 느끼면서 그 범위가 점차 넓어지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생활했음에도 아무도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 말을 거는 경우도 거의 없었고, 이따금 그에게 불순한 의도로 다가오는 이들이 있었지만 곧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때로는 사라지게 했다. 그리고 그때, 그녀가 집에 왔다. 


그녀에게는 장애가 있었다. 신체가 아닌 정신지체였는데, 처음 준서가 집에 왔을 때는 그것을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자꾸 웃는 얼굴을 보이는 그녀를 그는 이상하다고 생각했고, 그 웃음이 그녀의 장애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녀의 성품에서 비롯된 것인지 잠시 고민했을 때 그녀는 이미 아주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녀는 이제 술주정처럼 퇴폐하게 변해버린 아버지의 투정 같은 폭력이나 준서의 정신적 감정적 장애 혹은 감정의 훼손은 담은 눈빛을 신경 쓰지 않았다. 전날의 일과는 관계없이 늘 아침에는 따뜻한 밥이 차려졌고, 그녀는 늘 웃는 낯으로 집에 머물렀다. 그 무렵, 준서는 폭력에 대한 미학을 갖추기 전이었고, 그의 폭력은 동물을 거쳐 인간에게 닿기 시작했기 때문에 종종 엉망이 된 얼굴로 집에 들어오곤 했었다. 사실 외적 폭력의 충돌이란 영화나 드라마처럼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한 사람을 제압하기 위해 그는 자신이 지불한 폭력만큼의 폭력을 받아야 했고, 그래서 폭력의 현장은 멋있고 아름다운 장면이 아니라, 치고받는 현장이 아니라, 마치 짐승들의 몸부림과 같이 매우 정제되지 않은 무분별한 발산의 장면일 뿐이었다. 하지만 준서는 그 현장에서 분명히 무엇인가를 배워가고 있었다. 그는 고통스럽지만 고통스럽지 않아 보였으므로, 그는 폭력에 익숙했으므로 마구잡이로 힘을 휘두르는 그들과는 분명 다른 것을 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는 폭력에 눈 돌리지 않았다. 그러자 상대방의 무절제함 속에 섞여 있는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준서는 점차 많이 움직이지 않고도 무엇인가를 뒤틀고, 무엇인가를 찌르고, 무엇인가를 찢어 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점점 많이 다치지 않게 된 어느 날이었다. 

집은 조용했는데, 문을 열자 곧 알 수 있었다. 폭력의 흔적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밥상은 날아가 구석에 처박혀 있었고, 음식물은 사방에 뿌려져 있었다. 돈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이었는지 아버지는 흔적을 잔뜩 남기고, 집을 나가버렸고, 방 한구석에는 그녀가 잠들어있었다. 텔레비전만 혼자 말하고 있었는데, 그 불빛 사이로 그녀의 얼굴 여기저기가 터지고 찢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준서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상처를 만졌는데, 그녀는 그 순간 그녀의 어머니이기도 하고, 자신이기도 했다. 실상 그는 그녀의 아픔이나 장애에 대해 아무 감정을 갖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처럼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잠들어 있는 그녀는 그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멈춰있던 감정의 무엇인가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관통하자 준서는 그녀의 상처를 만지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려버렸다. 그리고 눈을 뜬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의 상처를 함께 만지며, 그 약간 뒤틀린 얼굴로 웃어주려고 노력했을 때 준서는 아버지에 대한 살의가 폭풍처럼 쏟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사실 준서는 그때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상태였고, 무엇인가 무분별한 감정의 상태였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 그의 상태를 지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단지 본능적인 동질감으로,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고, 그를 품에 안아주었다. 그건 모성을 느끼는 여성의 본능적인 행동이자, 같은 폭력의 피해자로서 동질감의 행동이었고, 그 행위가 그녀에게도 일정 부분 위안을 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준서의 숨이 거칠어지고, 그의 손이 그녀의 가슴에 와닿았을 때, 그리고 준서가 그녀의 찢어진 입술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준서에게서 또 다른 폭력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의 부친이 가진 퇴폐적이고, 퇴행적인 폭력이 아니었다. 그 폭력의 양에서도 질에서도 그의 부친과 비교할 수 없는 정도의 것이었으며 무엇보다 그것은 정제되기 전의 그것이었다. 준서가 그녀의 옷을 찢고 그녀의 몸을 강제로 취하는 동안, 그녀는 끝없이 저항했고, 울부짖었다. 일련의 행위가 끝났을 때, 준서는 울부짖는 그녀를 바라보며 성욕과는 또 다른 욕망을 느꼈다. 

그는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준비한 칼로 아버지를 찔렀다. 찌르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실상 칼을 빼는 것이 어려웠을 뿐. 아버지는 버둥거렸지만 곧 조용해졌다. 소리 지르지 못하게 하는 일이 좀 번거로웠을 뿐. 그녀는 이미 사망해 있었다. 준서는 그녀를 가능한 고통스럽지 않게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발버둥 쳤고, 준서는 수 차례 시행착오 끝에 교살할 수 있었다. 아버지를 찌른 칼에는 그녀의 지문이 묻어있었고, 그녀의 시신은 장롱 문에 목이 매달려 있었다. 그녀의 옷은 여전히 찢어진 채였고, 누군가는 그녀가 동거하는 남자의 폭력에 못 이겨 그를 찌르고 자살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현장의 다른 흔적을 발견하고는 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할 것이다. 


그 뒤로 준서는 집을 나왔다. 학교로 경찰관이 찾아왔고, 그는 조사를 받았지만 참고인이었다. 돌아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보호시설에 잠시 있었는데, 졸업을 앞둔 시점이었기에 그가 사라져도 그를 찾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집은 술 취한 아버지가 장애를 가진 동거녀를 폭행하고 그녀가 휘두른 칼에 찔려 사망한 후 화재로 사라져 버렸다. 동거녀는 찌게 냄비를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은 채로 폭행을 당했는데, 동거남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 그러자 냄비가 타들어가기 시작했고, 가스레인지 앞에 널어놓은 행주와 낡은 커튼에 불이 붙었다. 다행하게도 화재로 인해 다른 사상자가 발생하지는 않았는데, 워낙 반지하의 공간이 협소하고 소방차의 진입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집에 제대로 남은 것은 없었다. 시신들은 훼손되었는데 상황을 알 수 있을 만큼의 형체는 남아 있었고, 사실 그 누구도 그들의 생활이나 죽음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살해와 화재는 신문의 작은 면을 차지한 후 잊혀 버렸다. 그리고 동거남에게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과, 그가 보호시설에서 사라졌다는 것도, 아무도, 심지어는 담당 경찰관이나 보호시설 관계자조차 신경 쓰지 않거나 알지만 외면했다.  

이전 06화 진상 6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