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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승유 아빠 Oct 17. 2022

잔상 9

어떤 남자의 흔적들

준서는 며칠 동안 그녀에게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얼굴을 노출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녀를 한 번 본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니, 사실 충분하지 않았다. 그녀를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좀처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를 지금 해치고 싶다는 욕망이 자꾸 준서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녀의 목을 조르고 서서히 숨이 막히는 것을 바라보고 싶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녀의 입을 막아놓고 서서히 통증을 느끼게 하고 싶기도 했다. 심장에서 아주 먼 곳부터 시작해서 점점 심장 가까운 곳까지. 그러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의 얼굴을 후려치거나 그녀의 그 흰 볼을 마음껏 깨물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 가슴을 짜릿하게 하는 행위들은 당분간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것들이었다. 계속 이 일을 하기 위해서 자제력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특히 자신의 흔적을 남길만한 행동은 금지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위해 그녀에게 가까이 접근하지 않았다. 그는 아주 평범한 사람들처럼 조금 멀리 떨어진 채로, 그녀를 따라가고 있었다. 어떤 날은 정말 낚시를 하기도 했고, 어떤 날은 편의점 앞에서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기도 했다. 하지만 준서의 목표는 분명했으므로 그는 자신을 잃지 않았다. 이미 그녀의 주소도 알고 있었고, 집으로 가는 길들도 알고 있었다. 준서는 그녀가 있는 곳에서 먼 곳에 숙소를 잡았고, 차는 멀리 있는 곳에 주차했으며, 줄곧 천천히 걸어서 접근했다. 그가 원한다면 단숨에 그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먼저 그는 매일 다른 옷을 입고 그녀의 집 근처를 걸어 다녔다. CCTV가 있는 곳을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그녀의 집 근처에 경찰서나 누군가가 달려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지도 살펴야 했다.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따르며, 친구가 있지는 않은지, 사귀는 사람이나, 변수가 될 만한 요소가 있지는 않은지 충분히 살펴야 했다. 그의 의뢰인 즉, 은주의 남편이 요구한 것은 간단했다. 그 나쁜 년이 자신의 행동을 후회할 수 있도록 고통을 줄 것. 아마 그가 원한 것은 원시적인 폭력에 가까운 것이겠지만 준서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남편만 생각해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경박하고 치졸한 말투와 행동이 떠올라 당장이라도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그는 애써 참았다. 그에게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준서는 최대한 깔끔하게 그녀를 처리할 작정이었다. 먼저 그녀를 제압할 것이었다. 사실 사람을 제압하는 것은 죽이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혹은 소설 속에서 보듯 손짓 한 번에 사람이 쓰러지는 일은 좀처럼 없다. 조금만 실수해도 일은 돌이킬 수 없이 비틀어지기 마련이므로 준서는 차분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준비하려고 노력했다. 손목이 조금만 비틀어지거나, 도구가 생각보다 튼튼하지 않거나, 무게의 변화가 있다면 대상은 단번에 쓰러지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보통 상대는 소리를 지르거나 맞서게 되기 때문에 일은 복잡해지고 외부의 변수가 끼어들 가능성도 높아진다. 물론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일은 반드시 마무리되기 마련이지만, 단순하고 깔끔한 마무리를 위해서 상대를 먼저 쓰러트리려고 마음먹었다면 반드시 단숨에 끝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상대방이 인식하기도 전에, 인식 끝에 돌발적이고 충동적인 행동이 나타나기 전에 여러 번 반복해서 처리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었다. 단번에 쓰러트리는 일에 집착해서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게 되면, 죽거나 과도한 출혈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과도한 출혈은 성급한 마무리를 낳고, 성급한 마무리는 실수를 낳기 때문에 정확하게 치밀한 준비가 필요했다. 준서는 먼저 그녀의 의식을 잃게 할 참이었다. 상피세포 하나라도 남기지 않기 위해서 이미 두발과 온몸의 털은 밀어버렸다. 팔과 다리에는 딱 붙는 복장을 착용하고 위에 가벼운 옷을 걸쳤다. 비옷을 입거나 우산을 착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방수가 되는 외투는 비가 떨어지는 소리를 내기 때문에 방수성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최대한 소음을 감출 수 있는 외투를 입고 어두운 길로 걸어서 도착할 예정이었다. 사실 이미 준비는 끝나 있었기 때문에 당장 달려갈 수도 있었지만, 준수는 가까스로 참았다. 그는 골목 어귀에서 그녀의 귀가를 기다렸다. 그녀는 볼 수 없는 곳에서 그녀가 매일 정시에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했다. 다음으로 집 주변에서 그녀가 도움을 청하거나 청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해야 했다. 매일 다른 옷을 입고 집 주변을 배회했다. 주변에 사는 사람들을 확인했고, 그녀와 유대관계가 없음을 확인했으며 마침내 그녀에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이틀 동안, 그녀의 담 밖과 안쪽에서 그녀를 관찰했다. 가로등도 제대로 설치치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작은 마당 구석에 그가 숨을 곳은 얼마든지 있었고, 아홉 시가 넘으면 골목을 오가는 사람은 없었고, 주변에 개를 키우는 사람도 없었기에 얼마든지 시간을 두고 상황을 관찰할 수 있었다. 첫날은 비가 조금씩 내렸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집 가까이에서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그녀는 늘 조용했다. 필요 이상의 소음을 내는 법이 없었다. 오죽하면 준서는 그녀가 집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창 안 편을 살펴야 할 정도였다. 그녀는 음악을 트는 법도, 텔레비전을 트는 법도 없었다. 달그락거리며 무엇인가를 해 먹고는, 조용해졌다. 집안에 불은 온통 켜져 있었지만,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알 수는 없었다. 영상을 보는 것도 아니었고,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준서는 다시 그녀가 잠들었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녀가 불을 끄고 잠드는 시간도 그가 알아야 할 것 중 하나였다. 조금 열린 창 너머로 그녀가 침대에 누워있었다. 잠든 것은 아니었는데 천장을 바라보며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인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준서는 잘 알고 있었다. 절망에 빠지거나, 실의에 빠진 사람들을. 하지만 그녀는 그런 상태도 아니었다. 무엇인가 평화로운 상태, 아니 평화를 갈망하는 상태. 결코 실의에 빠지거나 절망하지 않은 상태였다. 남편에게 폭행당했을, 그보다 심한 짓을 당했을, 그것도 상당히 오랜 시간을 견뎌왔을 그녀는 여전히 절망에 빠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깨끗하게 세탁된 침대 위에 누워있었고, 중년을 맞이하는, 약간은 주름지지만 여전히 젊을 때의 모습을 간직한 얼굴은 평화로웠다. 집에 불이 온통 환하게 켜져 있었기 때문에 준서는 한참을 그녀를 바라볼 수 있었는데, 그녀의 모습을 보면 볼수록, 준서의 기쁨은 커져갔다. 마치 예전에 그녀처럼, 아버지의 동거녀에게 그랬던 것처럼, 준서는 무엇인가 참을 수 없는 충동에 휩싸여갔다. 당장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마침내 무엇을 하게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지만 그는 당장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에게는 절차가 있었다. 늘. 그에게는 늘 충동이 있었지만, 그에게는 늘 절차가 있었다. 그것은 신성한 절차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이 일을 더 오래 할 수 있도록 그를 지켜줄 절차였다. 그리고 그가 창 아래 벽에 기대에 아무 소음도 내지 않는 그녀의 평화를 듣고 있을 때, 그는 결심했다. 바로 내일이라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숨죽여 숨을 내쉬며, 마스크 아래로 크게 미소 지으며 그렇게 다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무엇인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끌리고, 절뚝거리는 소리가 거세진 빗소리 안에 섞여 들리고 있었다. 준서는 더욱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며 그 소리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는데, 그 소리는 그녀의 집 앞에서 멈췄다. 준서는 소리 나지 않게 몸을 돌리며 집의 다른 벽으로 돌아가려 했다. 혹시 그녀가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몸을 숨겨야 했고, 계획은 처음부터 다시 수정되어야 했다. 하지만 소리는 더 이상 나지 않았다. 마치 무엇인가 기다리는 것처럼, 무엇인가 머뭇거리는 것처럼, 절뚝거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죽여버려. 


머릿속 깊은 곳에서 소리가 울렸다. 아니, 그것은 소리가 아니었다. 늘 갖추고 있던 본성의 무엇인가가 그의 머릿속을 울렸다. 


그가 왔어. 죽여버려. 

그가 왔어. 갈가리 찢어버려. 

그가 왔어. 당장 그를 쫓아가서 죽여버려. 

당장, 당장, 죽여버리라고. 


머릿속에 목소리가 소리 지르고 있었다. 준서는 귀를 막았지만 소리를 막을 수는 없었고, 준서는 자신이 미쳐버렸을 거라고, 아니 이미 미쳐있었던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머릿속을 울리는 소리를 멈출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준서는 거친 숨을 쉬며, 비틀거리며 집 밖으로 향했다. 숨소리와 발소리가 났을 것이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문 밖에 있는 괴물이든, 인간이든, 악마든, 무엇이든 죽여버려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이윽고 그가 문을 거칠게 열었다. 그리고 골목 저편으로 숨어드는 그림자를 향해 달려갔다. 


죽여버려!!!!!!!!!!!!!


죽여버리리라. 반드시 죽여버리리라. 하지만 그는 없었다. 분명 골목 어딘가에 그가 있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았고, 머릿속의 목소리도 덩달아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자석의 다른 극처럼, 자신을 끌어당기는 그를 느낄 수 있었다. 신경이 날카롭게 벼려져, 바닥이나 철로 된 문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도 들릴 정도였다. 분명 자신과 반대편에 속하는 무엇인가가 숨어 있었다. 그리고 준서는 숨을 죽이고 어느 대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 새끼가 여기 있어. 바로 여기야. 여기.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속삭이고 있었다. 그래 여기구나. 준서는 마음속으로 속삭이며 문에 손을 가져다댔다. 마침내 그를 발견하리라. 그럼 그를 맨손으로 죽여버리리라. 비가 나의 흔적을 지워주리라. 이 목소리도. 


"순규냐?"


목소리와 함께 준서는 현실로 돌아왔다. 열려던 문을 그대로 두고, 뒤를 돌아왔다. 점점 거세지는 비를 맞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리고 머릿속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내일이야. 마침내. 이제 더 이상은 시간이 없어. 참을 수도 없고. 


그래 내일이야. 만약 나를 방해한다면, 가만히 두지 않을거야. 


그래, 그 병신같은 새끼가 우리를 방해하게 두지 않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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