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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승유 아빠 Oct 17. 2022

잔상 10

어떤 남자의 흔적들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그의 악의와 나는 강렬하게 연결되어 서로 직시했으며 만약 그대로 있었더라면 나는 악의와 정면으로 마주쳤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날카로운 악의가 나를 직접 해칠 수 있었을까? 아니면 그 악의가 그를 나에게로 이끌었을까? 그 악의는 그의 행위를 이끌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의 행동이 악의를 만들어내고, 의지를 부여하고 있는 것일까? 문이 열리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 직후 악의의 집중력이 흐트러진 직후 나는 몸을 돌려 그림자로 몸을 숨겼다. 비는 엄청난 소음을 내며 떨어지고 있었고, 가로등조차 없는 어둠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어둠 속에 동화될 수 있었고, 그가 멀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잠시 기다렸다가 집으로 돌아왔는데, 다리는 몹시 절고 있었고, 머리가 몹시도 아팠다. 특히 수술 자국을 감추고 있는 머리 아래쪽이 아파왔는데, 뜨거운 돌을 머리에 대고 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절뚝거리며 비틀거리며 은주의 집과는 반대편으로 한참 돌아 집으로 돌아왔다. 의식은 흐릿했고, 머릿속은 뜨거웠다. 몸이 계속 처져서 몇 번인가 쉬는 일을 반복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시간을 정확하게 알 수 없었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거나, 그렇게 느껴진 것 같았다.


1990년대 초 내가 살던 서울 변두리는 여름마다 수해를 겪었었다. 어느 해, 하천 옆으로 둑을 쌓고, 무슨 공사를 한 이후로는 그런 일이 극히 드물었는데, 그전까지는 거의 매년 물난리를 겪어야 했다. 우리 집에 가려면 큰길에서 버스를 타고 내려 골목을 한참 지나야 했는데, 큰길에서 골목으로 들어서는 어귀가 늘 물바다가 되곤 했었다. 나는 어디든 가려면 그곳을 지나야 했는데, 어머니는 물에 젖는 일을 극도로 싫어했었기 때문에 나는 비가 오는 날이면 조심해야 했다. 어느 날은 일부러 바지가 젖도록 몸을 숙였는데, 어머니는 전에 없이 몹시 화를 내며 다시는 일부러 ‘똥물’에 젖지 않도록 다짐하도록 했다. 물론 나는 그 약속을 꼭 지킬 것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약속 이후로 나는 일부러 몸을 적시곤 했다. 물론 어머니에게는 어쩔 수 없이, 버스가 지나갔다거나, 생각보다 깊은 곳을 밟아서 장화가 젖었다거나 하는 핑계를 댔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규칙을 어긴다는 것 자체에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 해에는, 정말 비가 많이 내린 해였는데, 물이 정말 많이 고여서, 버스도 다니지 못할 정도였다. 골목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정말 허벅지까지 적셔야 할 정도였는데, 사실 나는 그 사실이 내심 기쁘게 느껴졌다. 물이 발목을 적시고, 무릎을 적실 때까지만 해도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물이 허벅지까지 적시자, 갑자기 이상한 용기가 생겼다. 나는 마치 수영장에서 혹은 계곡에서 그러하듯 몸을 숙여, 목까지 물속으로 들어갔다. 물에서는 악취가 나고 있었고, 세차게 내리는 비에 그 똥물이 얼굴에 튀고 있었지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옷도 모두 젖었고, 사실 가방도 모두 젖었지만 그 순간에는 가방이 젖을 수 있다는 사실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하수구에서 역류한 물속에 얼굴만 남기고 잠겨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것은 신경 쓰지 않은 채, 오리걸음으로 골목까지 다가갔다. 마침내 골목에 이르렀을 때, 온몸이 악취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오물로 뒤덮여 있다는 것을, 어머니가 반듯하게 다려준 옷들이 엉망이 되었다는 것을, 가방의 책들이 엉망이 되어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의 질책과 원망의 표정을 피하기 위해 다시 어머니의 통제 아래 들어가기 위해 방법을 찾았지만 방법은 없었다. 넘어졌다는 거짓말뿐.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결코 물에 젖거나 비를 맞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했던, 어머니의 말을 어긴 것에서 일종의 쾌감을 느끼고 있었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날, 어머니는 내가 일부러 똥물을 뒤집어쓴 것을 알 수 없었다. 비는 너무 많이 내렸고, 공장은 물에 잠기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내가 망설임에 비를 오래 맞는 동안 오물이 어느 정도 씻겨 내려갔기 때문에 그랬다. 나는 그다음 날 아침부터 열이 나기 시작했는데, 열이 좀처럼 내려가지 않았다. 열은 몸속 깊이에서 나와 몸에 퍼졌는데, 이상하게 손과 발은 차고, 몸이 떨렸다. 머리가 아프고, 몹시 추웠는데, 얼굴과 심장이 몹시 뜨겁게 느껴졌다. 어머니는 연신 내 이마 위에 물수건을 올렸는데, 흐릿한 의식 속에 어머니의 표정이 보였다. 나는 뜨거운 열기 속에서 어머니가 당신이 가장 싫어하는 행동을 한, 아들을 책망의 눈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순간 나는 죄책감보다 깨달음을 얻었다. 더 이상 어머니가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젖은 채로 방에 누워있었다. 몸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할 수가 없었는데, 누군가가 머리 위에 큰 돌을 올려놓은 것 같았다. 팔과 다리를 조금씩 움직일 수 있었지만, 머리를 좀처럼 들 수가 없었다. 머리는 밤새도록 아침이 올 때까지 뜨거웠는데, 어린 시절 열이 났을 때보다 더 그랬다. 마치 불로 달군 칼로 머리의 흉터부위를 지지는 것 같았다. 뜨거운 어떤 것이 머릿속에서 뛰쳐나오려고 하는 것 같았다. 흐릿한 시선 끝에 거실 유리창이 보였는데, 유리창으로 내 모습이 비쳐 보이는 것 같았다. 거기 어머니가 어릴 때, 내가 아플 때 그랬던 것처럼 내 곁에 있었다. 이때까지 거의 모든 잔상들은 표정이 없이 서 있는 모습이었다. 은주를 해치려는 그를 제외하고는 그랬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상하게도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몹시 슬퍼 보였다. 슬픔의 방향이 나를 향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를 향해있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랬다. 그리고 아침 해가 떠오를 때쯤에는 조금씩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가까스로 학교에 전화를 걸어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발열로 도저히 출근할 수 없음을 밝혔다. 그리고 맨바닥에 쓰러지듯 누워서 거울을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거기 없었는데 대신 어제 나를 바라보던 악의와 은주가 거기 있었다. 나는 손을 내저어 그들을 사라지게 하고, 대신 어머니와 아버지의 잔상을 불러왔다. 이상할 정도로 쉬운 일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잔상이 나타나도록 노력하는 것과 모든 잔상이 사라지도록 노력하는 것뿐이었다. 내가 원하는 잔상을 불러오고 이렇게 쉽게 잔상을 사라지게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기뻐할 수 없었다. 머리는 여전히 뜨거웠는데, 이제 머리를 뜨겁게 하는 것은 달궈진 칼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머리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가를 반복하는 와중에 나는 그를 떠올렸는데, 심지어는 그의 악의마저 떠올릴 수 있었다. 이제 그의 악의는 완전히 칼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 칼은 흔하게 볼 수 있는 주방에서 쓰는 칼이었고, 그 칼은 분명히 누군가에게 사용된 것이었다. 그 악의가 누군가를 해친 것이 아니라, 그가 누군가를 해쳤다는 사실이 칼이 되어 나타난 것 같았다. 나는 그 칼을 똑바로 바라보려고 했지만 정신을 집중한 뒤에 의식을 잃었다. 의식을 잃는 시간이 계속 짧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정오쯤에는 상당히 오랜 시간 정신을 차리고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칼은 잔상 속에서 분명하게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잔상은 단순하게 내가 그들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들과 나는 어떤 힘에 의해 연결되어 있었지만 그 연결은 상당히 희미하고, 일방적인 것이어서 그들은 나를 그렇게 바라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악의는 분명 잔상 너머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라는 것을. 나는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늦은 오후, 나는 벽에 기대어 앉아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그리고 힘겹게 내려놓은 거울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 오늘이야. 늦은 밤. 늘 같은 시간. 하지만 네가 뭐라도 할 수 있겠어? 

병신 주제에.

      

악의는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인지, 그의 ‘악의’인지가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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