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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승유 아빠 Oct 17. 2022

잔상 11

어떤 남자의 흔적들

준서는 숙소로 돌아온 후, 몸을 깨끗하게 씻었다. 그리고 자리에 누웠다. 비는 며칠 째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숙소는 안도 밖도, 눅눅했다. 그는 속옷만을 입고 침대에 누웠는데, 팔과 다리에 느껴지는 습기와 초여름의 열기가 몸을 뒤덮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머릿속의 소리는 지금 잠잠한 상태였다. 무엇이었을까. 그 목소리는. 그리고 누구였을까 그 문 뒤의 누군가는. 문 뒤에 있던 사람은 분명 자석의 반대편처럼, 자신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준서는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선과 악처럼, 단순하게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는 자신을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인간은 욕망의 동물이었으므로, 그는 자신의 욕망이 다른 사람과는 조금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늘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반대편을 '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선'은 없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그를 동정하고 위해주는 척한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욕망에서 기인한 것일 뿐, 동정의 대상이 더 많은 것을 바라는 순간, 사라지는 것들이다. 준서가 생각하기에 이타적인 인간은 없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 앞에서 선을 행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 뿐,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한다는 명예를 얻기 위한 것일 뿐, 진정한 이타심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그는 본 적이 없었다. 짧게 있었던, 시설에서도 그랬다. 부모를 잃은, 사실 그가 죽인, 부모를 잃은 청소년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랬다. 가식이라거나 거짓이 아니었다. 그들의 표정은 진짜였다. 그리고 그 욕망도 진짜였다. 그를 동정하고 그에게 무엇인가를 베푸는 사람들에게 순간적으로 보이는 의심과 불신을 표정을, 그를 진심으로 위하고 그를 위해 눈물 흘려주는 것을 주변에서 칭찬할 때 보이는 쾌감의 순간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위해 육체의 수고로움을 감수하는 사람들에게 느껴지는 정신적 쾌락을,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다른 사람에게 칭찬받는 것에서 느껴지는 그 마약과 같은 쾌락을 그는 언제나 놓치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결국 사람들은 똑같다고. 자신의 욕망이 다른 사람의 욕망과 다를 뿐. 그래서 그는 죄책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것은 합리화와는 다른 종류의 무엇이었다. 단지 그는 다른 종류의 욕망을 가졌을 뿐이고, 사람들의 욕망과는 다를 뿐이었다. 그는 육식동물이고 다른 사람은 초식 혹은 잡식 동물일 뿐이었다. 그리고 육식동물은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 그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속옷 차림으로 침대에 누워, 그의 다른 편에 있었던 '그'를 생각했다. 그가 누구보다 욕망에 충실한 사람이라면, 아까 문 뒤에 머물던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어떤 욕망도 이룰 생각이 없는 사람일까. 아니면 욕망이 없는 사람일까. 아니면 두려움이 많은 사람일까. 아니면 죄의식이 많은 사람일까. 아니면. 


그건 그냥 병신이야. 병신. 


머릿속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끝내 그 소리를 무시했다. 그 소리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까처럼 결정적 순간에 그 목소리가 자신을 방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건 정말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내일은 그녀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분명 변수가 생겼다. 외부와 내부에서 그렇다면 빠른 속도로 마무리하는 것이 좋은 선택이었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문 뒤의 그를 만나고 싶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맨 손으로, 꼭 맨손으로 그를 느끼고 싶었다. 실체를 전혀 알 수 없는 그를, 그리고 침대에 조용히 평화롭게 누워있던 그녀를 생각하며 준서는 잠들었다. 


아침이 되자, 준서는 서둘러 움직였다. 먼저 자신의 몸을 점검했다. 온몸에 흔적을 남길만한 요소를 살피고 몸의 컨디션을 살폈다. 집안을 청소하고 특히 욕실을 깨끗하게 정리했다. 자신의 흔적이 남을만한 것들은 모두 처리하고, 어제 비에 젖었던 옷가지들과 신발은 자신의 짐과 함께 없애버렸다. 몸에는 꼭 필요한 것들만 빼고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았다. 휴대전화도, 지갑도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배는 이미 예약이 되어 있었다. 그가 비행기로 제주도에 들어올 때와는 다른 신분으로. 터미널에 있는 사물함에는 그의 배편과 새 신분증이 이미 들어있었다. 그는 오늘 밤에 모든 일을 끝내고 새벽에 배를 타고 여기를 떠나면 될 것이었다. 렌터카는 반납을 하고 버스를 타고 목적지에서 먼 곳에 내렸다. 어떤 카메라도 없는 바닷가 작은 식당에서 올레길을 걷는 관광객들과 섞여 밥을 먹었다. 그리고 올레길을 따라 목적지로 걸어왔다. 비에 젖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비에 젖은 채 걷고 있었으므로. 그는 다른 관광객들과 다름없는 차림으로, 다를 바가 없는 웃음으로 이따금 바다를 보면서 탄성을 지르며 그녀의 집 근처까지 왔다. 그리고 관광객들이 모여있는 커피전문점에 들어가 커피를 한잔 마시며, 주위의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차림도 그랬고, 말투도 그랬고, 표정도 그랬다. 이따금 호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지만, 준서는 그 선을 어김없이 지켰다. 사람들은 준서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마 곧 잊을 것이었다. 그는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어두워지는 골목을 돌아 미리 그녀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으며 생각해 둔 곳으로 갔는데, 해가 진 후부터 거세진 비가 연신 그의 몸을 때리고, 적시고 있었다. 그는 비에 번들거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어둠 속에 완전히 동화되어 있었고, 아홉 시가 넘어 은주가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렇게 있었다. 이윽고 은주가 집으로 들어가 무엇인가를 만들어 먹고, 침대에 누워 있을 때쯤, 준서는 어둠 속에서 서서히 일어나 몸을 풀고 있었다. 젖고 추운 곳에서 오랜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몸 여기저기가 굳어 있었다. 그는 서서히 말단 부위부터 경직된 몸을 풀고, 긴장도 풀었다. 신경을 온통 세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어제 느껴지던 '그'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열한 시가 되자 집에 불어 꺼지고 어두워졌는데, 은주가 잠들었는지 확인하지 않고 그는 움직였다. 비가 생각보다 거세게 내리고 있었고, 바람도 거세지고 있어서 마치 태풍이 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소음은 그가 생각한 허용범위를 넘어서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는 구식 잠금장치를 가볍게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몸에서 떨어진 물이 바닥을 적시고 있었는데, 망설이지 않고 좁은 구옥을 가로질러 은주에게로 갔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반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입에서 비명이 나오기 전에 그녀의 입을 막고 목을 움켜쥘 수 있었다. 얇은 실리콘 장갑 아래로 느껴지는 그녀의 목덜미 때문에 준서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는데, 마침내 그녀에게 와서 닿았다는 사실이 그를 너무나도 큰 흥분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단지 닿았을 뿐인데도, 준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흥분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초인적인 자제심으로 그녀를 단지 제압만 했을 뿐이었다. 웃음을 참지 못하는 얼굴과는 반대로 그의 몸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준서는 그녀를 제압하고 재빠르게 그녀를 포박했다. 입을 막고, 그녀의 당황한 얼굴과 눈빛을 가까이에서 바라보았다. 쓸데없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녀를 응시했을 뿐. 그를 방해하는 누군가가 없다면 그는 그녀를 더 오래 응시하고 싶었다. 그녀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목을 졸랐다가 다시 살렸다고 하는 행위를 반복하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절망의 눈물을 흘리고, 그 절망마저 느끼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녀를 보내주고 싶었다. 그 욕망이 너무 강해서, 준서는 그리고 그 머릿속의 목소리는 누군가 절뚝거리며 집으로 다가오는 것을 알 수 없었다. 지팡이로 땅을 짚는 소리가 이따금 울렸음에도 불구하고 준서는 그녀를 응시하느라, 그의 악의는 준서가 그녀에게 고통을 주는 순간을 준비하느라 바로 곁에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준서가 응시를 멈추고, 공포에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갈 때,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목을 서서히 조르기 시작할 때, 그녀가 정신을 잃고, 준서가 거친 숨을 내쉬고, 그녀가 다시 정신을 차리기를 기다리려고 잠시 몸을 일으켰을 때, 바로 '그'가 창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잠시 준서와 그와 그리고 그의 악의가 서로 응시했을 때, 아주 잠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은 채, 셋은 서로를 응시했다. 그 순간 준서는 자신의 안에 악의를 보았는데, 그것은 자신의 눈이 아닌, 자신의 정면에 서 있는 '그'의 능력을 통해서라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악의가 크게 분노하고 있으며, '그'는 자신을 방해할 생각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고, 그것이 준서를 화가 나게 하면서도 기쁘게 하고 있었다. 준서는 진심으로 그에게 다가섰다. 그는 지팡이를 들어 크게 휘둘렀지만 그의 다리는 그 힘을 버티지 못하는 것 같았고, 그의 팔도 그런 것 같았다. 몹시 균형 잡힌 준서의 팔과 다리는 그 지팡이를 가볍게 피하고, 방해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정말 기쁜 마음으로 그 얼굴을, 흉터로 일그러지고 비에 젖어 미끌거리는 얼굴을 크게 가격했다. 무엇인가 부러뜨리는 느낌이 준서를 기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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