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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승유 아빠 Aug 25. 2022

잔상 4

어떤 남자와 흔적들

내게 보이는 잔상은 어떤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그것들이 나의 기억의 편린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거울 너머로 보이는 아버지의 일그러진 모습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실제 아버지는 사고 당시 측두부에 상당한 손상을 입었고, 한쪽 안구가 파손된 상태였다. 오른 다리는 사고 당시 거의 절단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잔상에서 보이는 아버지의 상태는 아버지의 현재 상태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시신도 상당히 훼손되어 있었지만 나의 잔상 속에 어머니가 생전과 같은 모습인 것은 어머니가 사망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즉, 나의 잔상은 살아 있는 사람과 연결된 무엇인 듯싶었다.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있는 동안, 아버지의 잔상은 일그러진 모습 그대로였다. 붕대나 어떤 가림막도 없이 상처받은 상태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모습에 익숙해질 때쯤에는 아물어가는 상처 사이로 출혈도 확인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리고 6개월 후 어느 새벽, 거울 속의 아버지는 사고 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아마 나의 잔상은 살아있는 사람과 연결되어있는 듯했다.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현재의 상태를, 생명을 잃고 나서는 내 기억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들의 차림이 내 기억 속에 그것인 것으로 보아 잔상은 외부적 연결과 나의 기억 그리고 알 수 없는 무엇가 뒤섞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나는 그들이 보일 뿐 아니라 그들을 느낄 수도 있었다. 아주 흐릿한 느낌이었지만 그들이 가까이 있는지 기분이 어떤지를 막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모습이 최근까지 예전 모습이었던 것으로 보아 거리상의 제약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그냥 때때로 마주치기 싫은 사람을 피하거나 나에게 필요한 사람을 찾아가는 데 사용할 뿐이었다. 

처음에는 잔상을 통제할 수 없었다. 아침 거울에는 내가 알고 있던 사람들과 지금 살아있거나 살아있지 않은 사람들이 가득 떠 있었다. 때로는 스쳐 지나갔던 사람의 얼굴이 흐릿한 유령처럼 맺혀 있기도 했고, 꿈에 나온 것 같은 사람, 혹은 사람이 아닌 것이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재활이 시작되고, 출혈 때문에 열었던 머리뼈가 아물고, 화상이 아무는 동안 나는 수시로 공포에 떨었다. 어떤 날은 재활을 마치고 앉아 있는 건너편 거울에 외할머니가 서 있었던 적도 있었다. 그리고 어떤 날은 우연히 마주쳤던 남자의 모습이 며칠 동안 거울 너머로 보이기도 했다. 얼굴은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남자의 뒷모습 너머로 불길한 그림자가 함께 보였다. 그림자는 생명체처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를 반복했고, 그 불길한 느낌에 나는 도저히 거울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불길한 그림자는 거울을 통해 나를 엿보는 것 같았다.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거울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거울이 너무 많았다. 거울이 될 만한 것도. 이따금 시내를 지나는 길에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었다.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사람의 느낌이 아닌 것도,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지 않지만 사람인 것도 있었다. 그래서 보험금을 받고 집을 구해야 할 때, 나는 망설이지 않고 서귀포의 작은 마을을 선택했다.


저녁을 간단하게 해결하고 집을 나섰다. 

처음에 이사 올 때만 해도 온 동네의 집들은 바다를 향해 있었고, 그 집들은 돌담에 안겨 있었다. 바다를 인접하고 있는 동네는 어떤 때는 평화를, 어떤 때는 혼란을, 어떤 때는 폭력을 바다와 공유하고 있었다. 육지에 살던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바다를 인접한 집들은 온전히 평화롭지 않았다. 바다의 평화는 늘 고요하고 완전한 평화였지만, 바다의 폭력은 내가 본 어떤 자연현상보다 원시적이었다. 바다의 혼란은 바람과 비와 소음을 몰고 왔는데, 처음 이곳에 이사 왔을 때는 조금만 범상치 않은 바람이 불면 잠이 들지 못했다. 미처 다 수리하지 못한 집은 바다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고, 바람은 끝없이 창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비가 떨어지는 소리와 바람이 부는 소리가 나를 흔드는 것 같아서 밤이 새도록 어두운 방에 앉아 불안하게 창밖을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바다가 주는 불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바다가 주는 원초적인 혼란과 공포는 직관적이고 진실했기 때문에 나의 내부를 조금도 흔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태풍이 지나간 푹잔 얼굴로 집을 나서는 이곳 사람들처럼 어느샌가 나도 아무렇지 않은 마음으로 아침을 맞이하게 되었다. 바다는 나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는 않았으므로, 나는 바다 때문에 좌절하거나 슬퍼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혼란 뒤에 맑은 하늘에 오히려 감사하게 될 것이므로. 사실 나는 바다 앞에서 서서히 치유되어 갔다. 그리고 돌담. 돌담을 끼고 걷는 길은 얼마든지 편안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잔상이 없었고, 잔상이 나타날 기회도, 검은 그림자의 차가운 시선도 없었다. 매일, 한참을 나는 돌담을 끼고 걸어 다녔다. 다리를 절면서, 때로는 다리를 끌면서, 피로감에 맨바닥에 앉아서 쉴 때도 있었지만 하루도 쉬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바다를 향한 집들이 하나둘 커피 전문점으로, 식당으로 바뀌기도 하고, 동네에서 보기 드문 여러 층 건물이 세워지기도 할 때쯤에는 나도 잔상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었다. 커피 전문점 유리에 여전히 잔상들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는 의지에 따라 잔상의 정도나 개수를 조절할 수 있었다. 오직 하나 그녀의 잔상만이 여전히 멀리 혹은 가까이 존재했다. 잔상이 아니었다면 잊었을 그녀의 얼굴이 초점 없이 거울 속에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돌담을 지나 새로 생긴 건물 근처에서 그녀를 찾고 있었다. 돌담 사이 주황색 지붕을 새로 올린 집을 지나 커피 전문점을 지나 얼마 전에 주인이 바뀐 식당을 향해 걷고 있었다. 식당은 한창 리모델링 중이었는데, 무엇인가를 자르다만 것을 그냥 바닥에 놓아두고 주인도 일꾼도 집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식당 옆은 오래된 마트, 그리고 그 옆으로 새로 지은 건물이 몇 채 줄지어 있었다. 여러 층으로 올려 바다를 멀리 조망할 수 있는 자리에는 또 다른 커피전문점과 식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바다를 접한 길가에는 차들이 주차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차 안에서 혹은 밖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가 내리려는지 습한 바람이 해가 저무는 바다에서부터 불어오고 있었다. 피부는 끈적하고 바람은 따뜻했다. 멀리 바다에서부터 비가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녀의 존재감 따뜻했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 반대편에서 그녀의 존재가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늘 익숙한 풍경 속에서 처음 보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거리 마지막 건물 맨 위층에 베트남 음식점 간판이 걸려 있었다. 간판에 불은 꺼져있었지만 삼층에는 희미하게 전등이 켜져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그녀의 카랑카랑하고 따뜻한 존재감이 나에게로 흐르고 있었다. 은주가 거기 있었다. 


그리고 아주 흐릿하고 끈적한 어둠의 한 조각도, 어디에선가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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