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승유 아빠 Jul 08. 2022

잔상 2

어떤 남자와 흔적들

생각해보면 1999년은 유례없는 혼란의 시기였다. 

특히 새 천년을 맞이하기 직전에는 더 많은 혼란과 문제가 산재해 있었다. 다들 열심히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아니 문제를 안고 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문제는 지뢰처럼 깔려 있었다. 그래서 아주 조금 발을 헛디딘 것으로도, 혹은 발을 전혀 헛디디지 않아도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아버지는 의류업을 하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의류를 생산해서 몇몇 브랜드에 납품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서울에는 그런 식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도시 변두리를 지나가다 보면 반지하에서 쉴 새 없이 재봉틀이 돌아가거나 사람들이 들락날락거리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아버지는 집 근처 몇 군데 반지하에 공장을 차리고는 바지와 티셔츠를 만들어서 납품했다. 하루 종일 공장에 있다가 집에 들어오면 온 몸에 실이나 먼지나 옷감 조각이 묻어 있었다. 그리고 두 손에는 공장에서 만들던 상표가 없는 옷들이나 치킨 한 마리가 들려있었다. 우리는 늘 상표가 없는 옷을 입고 다녔는데, 이따금 운동화도 그랬다. 크게 불만은 없었다. 우리 동네 누구도 그런 것들을 따지지 않았고, 많은 아이들이 목이 늘어난 티셔츠나 얼룩진 바지를 입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우리는 깨끗한 옷을 입는 것만으로도 삶에 불만이 없었다. 아버지는 낙천적이었고, 어머니도 그랬다. 낙천적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두 분은 늘 바쁘고, 바쁜 만큼 살림은 나아졌으므로. 우리는 반지하에서 지상으로 그리고 주택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우리가 그것을 특별히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못할 만큼 아주 천천히.

그리고 그날이 찾아왔다. 나는 대학생이었고, 딱 필요한 만큼 성장해 있었다. 내 방에 있는 미니 컴포넌트 너머로 '별이 빛나는 밤에'의 진행자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요즘 다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말을 하는 중이었는데, 나는 부모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1학기를 마치고 2학기를 보장받지 못했다. 군대를 가는 것은 아니었는데, 군대를 갈까 고민하고 있었다. 등록금 때문에 나의 2학기는 불분명했으므로, 나는 유예의 기간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아니, 부모님이 우리 모두가 그랬다. 아버지는 밀린 돈을 받지 못해서, 다시 밀린 돈을 지불하지 못했다. 여전히 반지하에서 만들어지던 상표 없는 옷들은 추가 생산이 중지되었고, 아버지는 옷들을 들고나가서 직접 팔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거의 밤마다 다투었고, 낙천적인 삶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날 아버지는 나와 어머니 앞에서 새 출발을 선언했다. 하지만 그건 새 출발이 아니었다. 그것 명백히 야반도주였다. 아버지는 밀린 돈을 지불할 능력이 없었다. 아버지에게 돈을 지불할 사람들은 돈을 줄 능력이 없었고. 아버지는 밖에서 옷을 팔고, 시간이 나는 대로 여러 군데를 돌아다녔다. 큰 회사들은 변호사의 뒤로, 다른 회사의 뒤로, 혹은 해외로 사라졌고, 아버지는 아무 데도 갈 데가 없었다. 그들이 책임져야 하는 돈보다 아버지가 책임져야 하는 돈이 훨씬 적었음에도 그랬다. 우리는 누구의 혹은 어디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나는 그녀가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마 내 시선에 닿는 어딘가에 그녀는 머물러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서둘러 옷을 입었다. 그리고 가방을 들고 골목으로 나갔다. 그리고 절뚝거리며 골목과 골목을 배회했다. 분명히 나의 시선이 닿을 수 있는 곳에 그녀가 있었다. 그녀가. 


처음 잔상을 본 날, 나는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다고 생각했다. 내가 귀신을 보는 거라고. 그리고 내가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고통은 의심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붕대는 머리 전체를 덮고 있었고, 얼굴의 절반은 거즈로 덮여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온몸이 아팠다. 팔과 다리는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았고, 특히 팔과 얼굴은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그게 정말 불에 덴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며칠 뒤였지만, 그 통증들은 내가 꿈이나 무의식의 세계나 초현실적인 세계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시켜 주었다. 나는 그 통증만큼 현실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리고 거울면으로 비춰 보이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평소 모습 그대로였다. 그녀도. 손을 들어 거울면을 만져보려고 했지만 손을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화장실까지 어떻게 도착할 수 있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거울 속에 그들은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부모님의 주름 하나하나 눈 아래에 물사마귀 하나조차도 내가 기억하거나 혹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목격한 그대로였다. 내 두뇌 속에 각인된 형상 그대로였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나의 뒤에 머물러 있었다. 마치 사진이나 그림처럼, 내 기억 속의 흔적처럼. 


그리고 통증과 혼돈 속에서 서서히 아버지의 모습이 변하고 있었다. 얼굴의 한 부분이 찌그러지고 있었다. 녹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충격을 받은 모양으로. 누군가가 커다란 망치로 아버지의 머리를 내리치고 있는 것 같았다. 쾅쾅쾅 들리지 않는 소리 뒤에 아버지의 머리는 눈에 띄게 찌그러져 있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손은 아버지의 얼굴 한 편을 짓누르고 있었다. 관자놀이에서 눈 쪽에 이르는 쪽이 꾹꾹 눌리고 있었다. 언젠가 물을 가득 머금은 비누를 손으로 짓누르는 것처럼 출혈은 없었지만 분명히 얼굴이 짓눌리고 있었다. 뿌드득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지만 전혀 현실감이 없었다. 생명이 아니라 물체를 파손시키는 것처럼. 하지만 분명히 아버지의 일부는 파손되고 있었다. 머리와 얼굴의 파손이 끝나자, 보이지 않는 손은 아버지의 다리를 제거해나갔다. 오른편 다리가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다리는 발끝부터 허벅지 중간까지 아주 서서히 사라졌다. 나는 아버지의 신체에 대한 파괴가 멈출 때까지 거울 앞을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지금 '파손'된 것이 아니라, 아버지는 이미 '파손'되어 있었다는 것을. 그것은 확신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그리고 나는 몸을 구부리고 뱃속에 있는 것들을 모두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나이 든 잔상을 보았을 때 나는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지금 여기, 내가 살고 있는 서귀포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이전 01화 잔상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