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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승유 아빠 Oct 18. 2022

잔상 13

어떤 남자의 흔적들

그를 마주했지만, 사실 내가 육체적으로 그를 이 길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한 손에 칼을 들고, 한 손에 지팡이를 들었지만, 그는 맨손이었지만, 그가 지니고 있는 균형 잡힌 육체의 강건함과 그의 머리 위를 맴돌고 있는 악의의 날카로움은 내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에 끼어들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내가 힘껏 휘두른 지팡이를 그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피했고, 그 순간 분명 그는 웃고 있었다. 빠른 속도를 내느라 지친 나의 다리는 평소보다 몹시 좋지 않은 상태였고, 열 때문에 흔들리는 팔의 상태도 그랬다. 지팡이를 휘두르는 순간, 나는 온몸에 힘을 주었지만 결코 그를 맞출 수는 없었다. 그가 내 지팡이를 피하고 나는 알 수 없는 충격을 받은 채, 방 한 구석으로 내팽개쳐졌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고, 몸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얼굴에, 정확하게는 코와 입에 받은 충격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고,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며 다음 충격을 기다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겨우 정신을 추스르고, 팔을 내리자 흐릿한 시야 속에 그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지팡이는 저 편에 떨어져 있었고, 칼은 어디에 떨어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는데 그는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코와 입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지만, 그가 나를 비웃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미지의 무엇을 바라보는 느낌, 하지만 그는 나를 전혀 위험요소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아무런 위협을 가할 수 없는 단지 '신기한 것'이었다. 그는 나를 조금 더 바라보고, 무엇인가를 묻기 위해 입술을 움직였지만, 곧이어 나에게 달려와서 무차별적으로 폭력을 휘둘렀다. 나는 온몸을 둥글게 말고, 그것을 견뎠는데, 그의 폭력은 정교한 무엇인 아닌, 단순한 폭력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단순한 폭력만으로도 이미 얼기설기 불안정하게 이어져 있는 나의 육체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악의가 칼처럼 날카롭게 나를 찌르고 있었다. 악의는 나의 육체를 직접 공격하지는 못했는데, 악의가 닿는 곳마다 저 안에서 근원적인 통증이 올라오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결과적으로 외부와 내부의 고통에 서서히 무너지고 마침내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그는 폭력을 멈추고, 몸을 숙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피로 가려진 시야 뒤에서 비로소 그는 입을 열었다. 

"너 뭐야. 도대체 뭐냐고."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차가운 목소리였고,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의 눈빛에서 이상할 정도의 분노와 악의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마치 자신의 악의 자체가 된 것 같았다. 그의 악의는 그 순간에도 나를 찌르며 비웃고 있었는데, 나는 그 악의를 피할 수도, 막을 수도, 비명을 지를 수도 없었다. 

"너, 도대체 뭐냐고. 대답해봐. 대답을 해보라고." 

그는 차분하지만 분노에 찬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 순간 그의 악의가 공격을 멈추고, 다시 무엇인가로 바뀌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칼이 아닌, 어떤 덩어리로, 붉은색이 아닌, 검붉은 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것은 붉지만 차고 냉정한 느낌이 아니었다. 원래 그의 악의가 가지고 있는 냉혹함은 사리지고 점차 짐승의 흉폭함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악의는 단순한 덩어리가 아닌, 사람을 형상으로 바뀌어 갔는데, 그건 사람의 얼굴이었다. 절반의 남성과 절반의 여성. 얼굴을 또렷하게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그 얼굴이 점차 뚜렷해질수록 그가 가진 흉폭함의 크기가 커져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가 입을 벌렸을 때, 그는 내가 잔성 너머로 들었던 악의의 목소리 그 자체로 바뀌어 있었다. 


"이 병신이, 여기가 어디라고 나타나. 내가 분명 갈가리 찢어서 바다에 넣어버린다고 했지? 저 년이랑 저랑 같이 말이야. 그리고 감히 나를 현혹시켜? 내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 줄 알아? 앞으로 얼마나 많은 쾌락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네가 감히 나를 흔들어? 네가? 팔다리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병신이? 감히?"

그는 몸을 한 차례 떨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몸을 일으키기 위해 힘을 주었는데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몸 안 쪽 어느 곳에서부터 통증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피 때문에 숨도 쉴 수가 없었고,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가 나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나는 팔을 들어 그를 뿌리치려고 했지만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헛되이 그의 옷깃을 잡을 뿐, 그를 육체적으로 뿌리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때, 정신이 아득해지고, 의식을 잃어 갈 때쯤 무엇인가가 나의 의식 속에서 현실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그가 당황한 듯 목을 조르던 손을 놓고, 뒤로 물러섰고, 그때 은주가 기침 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그 순간, 그의 악의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매우 흉폭해져 있었고, 짐승과 같은 근원적인 폭력 자체로 변해있었다.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는 악의는 기침과 함께 그녀 쪽으로 돌렸는데, 그건 겁먹은 짐승이 갑자기 움직이는 물체를 발견했을 때와 같은 반응이었다. 그렇다면 악의는 움직이는 것을 먼저 물어뜯을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몸을 돌리고 악의와 같이 몸을 돌리며, 은주를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아마 원초적인 폭력이 가해질 것이었다. 더 이상 냉혹하고 칼카로운 칼과 같은 폭력은 없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당황하게 만들었을까. 아니, 무엇이 그의 악의를 그토록 당황하게 만들었을까. 현혹시킨다는 말은 무엇이었을까. 흔들고 있다는 말은. 좁은 방에서 그는 한 두 걸음 안에 그녀에게 도달할 것이었다. 내가 가진 것은 무엇일까. 이 불안정한 육체와 아무런 욕망을 지니지 않고 무기력한 정신을 제외하고 내가 가진 것은. 그때, 나의 의식 뒤편에서 무엇인가가 발산되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스스로의 잔상을 볼 수는 없었다. 거울 속에 보이는 잔상은 다른 사람의 것이었고, 내가 그의 악의나 누군가의 잘못된 욕망의 흔적을 바라보는 것처럼 나는 나를 바라볼 수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사고를 당한 후부터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욕망을 가질 수 없었다. 의식주? 아무리 멋진 옷을 입어도, 나의 육체는 멋져 보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나를 꾸미지 않았다. 늘 크고 어두운 옷으로 나를 가리고, 머리를 길러서 흉터를 가리고, 늘 움직이지 않고 자리에 앉아서 팔과 다리의 불안정함을 숨기려 했다. 나는 편안하게 잠들 수 없었다. 밤은 늘 길었고, 수시로 잠에서 깨었기 때문에. 그리고 한 밤중에 거울 속에는 늘 낯선 잔상들이 떠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밤을 좋아하지 않았다. 밤은 두려움이었는데, 나는 그 두려움을 피하려고 했다. 그래서 밤에는 거울을 보지 않고 눈을 감은 채,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 몇 시간을 그렇게 누워있다 보면 내가 관 속에 누운 시신들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소화를 시킬 수 없었다. 나의 움직임은 늘 적었고, 나의 몸은 어딘가 고장 나 있었다. 나는 음식을 먹었지만 그것은 살기 위해 최소한의 것들을 욱여넣는 것일 뿐. 그것들은 온전히 나의 것이 되지 않았다. 나는 누군가를 만나서 웃고 떠들 자신이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이 나를 편견 없이 바라볼 것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잠시 사람들과 정신없이 떠들다가도 나의 몸이 예전의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다가 순간적으로 휘청일 때, 머리를 감기 위해 팔을 들어 올리다가 팔이 힘없이 떨어져 버릴 때마다 나는 나의 장애를, 나의 파손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심지어 은주가 나의 주변에 나타났을 때도 나는 은주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지금도 나는 은주를 올바르게 바라볼 수 없었다. 


하지만, 욕망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더 욕망한다는 이야기야.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원하는 거야. 너무 많은 것을 원하기 때문에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는 무엇이든 원한다는 거야. 그런 면에서 우리는 선도, 악도, 정의도, 불의도 아닌 무엇인가가 되어 버린 것이지. 사실 나는 저 악의마저도 원해, 저렇게 분명하고 강렬한 악의를 우리는 가져본 적이 없잖아? 늘 일은 시작되지만 마무리되지 않고, 사실 원하지만 이루어지지 않고, 원하는 것을 똑바로 바라볼 수도, 이야기할 수도 없잖아. 봐, 지금 너의 욕망은 은주를 구하려는 것이 아니야. 지난 며칠 동안 우리의 이야기에서 은주는 없었잖아. 과거의 은주가 사라지고, 지금 현재의 모습이 나타난 뒤로, 너는 은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잖아. 생각하지 않았잖아. 너는 오직 그와 그의 악의에 대해 생각했잖아. 은주의 모습도, 은주의 생각도, 은주의 상태도, 은주도 사실 너는 궁금해하지 않았던 거야. 생각해봐, 지난 며칠 동안 너에게 은주가 있었는지. 은주가 존재감이 있었는지, 네가 왜 은주에게 직접 다가가서 위험을 이야기하지 않았는지, 너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가 정당한 것이었는지 생각해봐. 그건 거짓된 이유였다는 것도 생각해보라고. 네가 지금 이렇게 있는 이유는 네가 욕망하기 때문이야. 너는 그가 지닌 악의를, 그 악의의 강렬함을, 네가 가지지 못한 직설적인 욕망을 원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생각해봐. 원해봐. 원한다고 이야기해보라고. 


그 목소리는 내 몸 안쪽에서 울려 나왔다. 악의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보다 더 깊은 곳에서.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힘이 되어 방을 가로질러 뻗어나갔다. 순식간에 방을 점령한 그 힘은 놀랍게도, 아주 투명했다. 아무런 색도 가지지 않은 그것이 바로 나의 욕망이었던 것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 것을 욕망했고, 나의 투명한 욕망은 사실 늘 곁에 있었지만, 지나치게 투명하므로 나는 그 욕망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욕망은 뒤를 돌아서는 그의 악의에 가서 닿았다. 그의 악의는 비명을 지르며 소스라쳤는데, 얼굴 모양의 악의가 입을 벌리고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나의 욕망은 악의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검고 붉은 악의는 바다에서부터 몰려오는 물안개처럼 흩어져갔는데,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의 욕망은 그의 악의처럼 분명한 모양을 갖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물결이 다가가는 것처럼 그에게 다가가 그의 본질을 나에게 가져오고 있었다. 그의 악의가 나에게 전달되자, 그는 몸을 돌렸다. 그의 웃음은, 분노는, 악의는 당혹함으로 바뀌어 있었는데 은주에게 가던 발을 멈추고 그는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동력을 잃은 열차처럼 서서히 무릎을 꿇고 움직임을 멈추고 있었다. 나는 그의 악의를 통해서 그의 욕망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욕망이 서서히 나를 채우는 동안 그를 향한 악의가 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내가 가져온 칼이 들려 있었는데, 그는 팔을 들어 올려 나를 향해 그것을 휘두르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악의는 절반 이상 나의 것이 되었고, 나의 팔은 순간적으로 정상의 그것처럼 느껴졌다. 아주 커다란 악의가 순간 나의 팔을 움직이게 도와준 것이었다. 나는 팔을 들어 예전에 건강했을 때보다 더 큰 힘으로 그의 팔을 잡고 그 칼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는 칼날이 자신에게 닿는 것을 막으려고 했지만 결국 칼날은 그를 향했다. 그는 나를 막기 위해 칼날이 자신을 향한 채로 몸을 던지려 했는데, 이미 그의 악의는 모두 내 것이 되어 있었다. 그의 욕망은 대부분 악의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제 그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나는 악의의 힘을 빌려 그의 몸을 돌렸다. 그리고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그 칼날이 그에게 깊숙하게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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