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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승유 아빠 Oct 18. 2022

잔상 14

어떤 남자의 흔적들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병원에 누워있었다. 온몸은 붕대로 감겨 있었고, 통증이 온통 나를 감싸고 있었다. 전신을 잃기 전의 일이 꿈이었던 것인지, 정말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내가 혹시 완전히 미쳐버린 것은 아닌지, 은주도 그도 모두 내 머릿속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내가 몽유병자처럼 길을 헤매다가 사고가 난 것은 아닌지. 어느 정도 통증에 익숙해지고 나자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고, 아무런 목소리도 낼 수 없기 때문에 나는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병실 창이 보였다. 창을 통해 나의 모습을 흐릿하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은주의 잔상을 보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은주는 나타나지 않았고, 내가 알던 누군가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정말 미쳐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 모든 잔상들이 사라져 버린 것일까? 그와의 충돌로 나의 힘? 욕망? 나의 것이 사라져 버린 것일까? 은주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주 놀랍게도 무심하고 건조하게 이런 생각을 떠올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잔상을 잃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몰려왔지만 상관은 없다는 생각도 몰려왔다. 숨을 몰아쉬자 코와 입 주변이 너무 아파왔다. 아프다는 것 빼고는 다른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그 통증이 가라앉자, 이번에는 호흡을 가만히 시도했다. 천천히 숨을 쉬며 병원 천장을 바라보았는데 무엇인가가 잔잔하게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것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하게 존재했다. 나는 그것을 직시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머리의 흉터부위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열감은 서서히 온몸으로 펴지고 그 열감 이면에 무엇인가가 다시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거울은 없었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병실의 천장이었고, 천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분명 나의 욕망이었다. 나의 투명한 욕망은 병실을 채우고 있었는데, 그의 악의를 모두 먹어치웠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색을 보이지 않았고, 목소리도 내지 않았다. 아주 거대한 바다에 한 줌의 먹물을 부은 것처럼, 이름조차 모르는 그의 악의는 나의 내면으로 들어가 곧 나의 욕망 속에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나는 조금 더 숨을 깊이 쉬며 그의 악의를 찾았지만 그 악의는 너무 흐릿해서 인상만을 남긴 채,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나의 욕망은 아니, 나의 욕망하지 않음은 얼마나 깊고 넓었던 것일까.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은주를 생각했다. 통증이 다시 몰려왔지만 그것을 애써 무시한 채, 그녀를 생각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그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옅은 욕망에 휩싸여 있음을, 당황하고 있음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하지만 아주 무사히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그녀의 두려움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빨대로 음료수를 빨아먹는 것처럼, 배우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두려움을 가져오다가 실수로 다른 것도 가져올 수는 있겠지만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포기했다. 나는 그녀에게 멀어져서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나는 무엇인 되어 버린 것일까. 그리고 문득 다른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통증 뒤로 돌아가 나의 욕망을 그날 바다의 안개처럼 사방으로 뻗어냈다. 놀랄 정도로 힘들었고, 놀랄 정도로 아팠지만, 놀랄 정도로 많은 욕망들이 주변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저마다 연한 색을 지닌 사람들의 욕망과 생각들이 병동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이제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욕망도, 욕망의 색도, 모양도 알 수 있게 된 모양이었다. 

도대체 나는 무엇이 된 것일까. 알 수가 없었다. 무엇인가를 얻었다는 특별해졌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나는 모든 감각을 닫고 숨을 거칠게 내쉬며, 다시 통증 위로 올라왔다. 머리를 덮었던 열기가 사라지고 나는 문득 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의 상실이 너무나도 크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어쩌면 나의 상실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외롭고, 건조한 삶 속에서 아주 오래 살아야 하고, 타인을 엿보며 그들의 욕망을 빼앗기 위한 어떤 초현실적 존재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아무리 타인의 것을 가져와도 타인이 될 수 없는 그런 영원한 허무를 지닌 존재가 된 것 같았다. 


어쩌면 나는 욕망을 먹는 괴물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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