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한 번째 일기, 태양계는 아름답더라.

by 지승유 아빠

한 번도 그림 그리는 것을 즐겨본 적이 없다.


사실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좋아하지 않으니 좋은 평가를 받아본 적도 없었다. 딱 한 번, 칭찬 들었던 그림은 중학교 시절 미술 시간에 그린 그림이었는데, 선생님께서는 그 그림을 보며 자신이 아는 추상화가의 작품과 많이 닮은 그림이라며 좋아하셨다. 하지만 그 그림은 추상화가 아니었다. 몇 시간이나 정성을 들여 그린 풍경화였던가, 정물화였다.


어린 시절 내가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오로지 독서였다. 한낮에 텔레비전이 나오는 시대도 아니었고, 어머니가 동생을 업고 일하러 나가고 나면 할 수 있는 것은 책 읽기 뿐이었다. 어머니가 얻어 오신 동화책은 수 십 번을 읽어, 대사를 외울 지경이었기에 주변에 읽을 수 있는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중 어른들이 읽는 무협지나, 만화책도 있었고, 삼국지 같은 작품이나 시사 잡지도 있었다. 좋아했다기보다는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어른들이 읽는 책도 여러 번 읽다 보면 이해가 되기도 했고 시사잡지를 보고 아버지께 질문했다가 핀잔을 들었던 기억도 있다. 좋아서 무엇인가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일단 시작한 후 좋아진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이 스스로 어떤 것들을 좋아하고 푹 빠지는 모습이, 좋은 것과 싫은 것을 확실히 표현하는 모습이 조금은 낯설었다.

우리 딸이 몇 시간이고 그림을 그리고, 공룡의 이름을 마구 외울 때, 아이의 기분을 처음에는 공감하기 힘들었다. 무엇인가를 적극적으로 좋아하고 궁금해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 아이들의 기분은 어떤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이를 따라 공룡의 이름을 외우고 아이와 그림을 그리는 일이 처음에는 조금 힘들었다.

하지만 아내는 나와는 달랐다. 공룡의 이름을 외우고, 공룡 책을 사들이고, 공룡박물관을 자기 집 드나들듯하였다. 어느덧 둘은 공룡과 그림으로 소통하고 있었고, 노력이 부족한 나는 조금씩 소외되고 있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끝없이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탐색하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람이 좋아하는 일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을 알게 되고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함께 나누면서 그 사람과 가까워진다. 하지만 나는 '나의 아이'이기 때문에 그런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을 잘하지 못했다.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아이를 건강하게 하는 것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아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가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이의 출생에 기여하고, 아이의 육아에 단순히 기여한다고 해서 아이가 나를 좋아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 아이가 크면 나를 '부모'로 알아주기는 할 테지만 '한 사람'으로 나와 공감하고 어울려주기는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점점 들기 시작했다.

사실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 사람도 나를 좋아해 주기를 바란다면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아내와 아이에게서 핀잔을 듣는 것을 시작으로 나도 공룡 전선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자존심도 아버지로서의 권위도 버리고 공룡 탐험의 한 참가자가 되어 아내와 아이 사이에 끼어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곧 공룡의 이름을 알면 알수록 대상에 대한 애정이 생기는 것을 곧 느낄 수 있었다. 내 그림 실력은 조금도 늘지 않았지만 아이가 몇 시간이고 날카로운 표정으로 그림에 집중하는 것을 뿌듯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었고, 이제는 공룡놀이에도 참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둘째 아이에게도 그 시기가 찾아왔다.

우리는 큰아이 때를 생각해서 공룡에 대한 책을 읽어주고, 공룡 장난감을 쥐어 주었지만 아이가 관심을 보인 것은 큰아이가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던 우주에 대한 책이었다. 일상적인 말도 더듬더듬하는 아이가 더듬더듬 행성의 이름을 외우고, 한참을 태양계 그림을 바라보는 일은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다. 정말 아이들은 어쩌면 그렇게 각각의 다른 인격체인 것인지.


그토록 오랫동안 천왕성의 사진을 바라본 적은 없었다. 목성에게 수도 없이 많은 위성이 존재한다는 것도 최근에 알게 되었다. 토성 고리에 왜 무늬가 보이는 것인지 수성의 공전 주기가 왜 빠른지에 대해 알게 된 것도 최근이었다. 그리고 가끔 아이들이 잠든 후, 다큐멘터리를 통해 한참 우주를 바라보기도 했다. 태양계는 참 아름다웠다. 그리고 은하계도, 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주도 분명 아름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서귀포는 바람이 몹시도 불었다. 아이들을 재우다가 잠들었는데 한 시가 넘어 정신을 차렸다. 밖에 내놓은 모래 놀잇감들이 사방으로 날아가버려서 남들이 다 잠든 새벽에 난데없는 정리와 청소를 해야 했다. 바람은 불었지만 하늘은 맑았고, 별이 정말 많이 떠 있었다. 그리고 다시금 별들이 정말 아름답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내가 아는 우리 아이들과 앞으로 내가 알지 못할 아이들의 모습도 아름다울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이들은 오늘도 곤히 잠들었고, 둘째는 이제 기저귀를 하지 않고서도 밤새 아주 예쁘게 잠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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