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 일기-그동안 애 많이 썼다

상담 1/8

by 서한겸

오늘 일정이 다섯 개나 있었다. 병원, 도서관, 상담, 당근 물건 받으러 가기, 당근으로 산 물건 용달 기사님 통해 배달받기. 다섯 개 모두 큰일은 아니지만 오늘 꼭 해야 하는 일들이었다. 특히 이 마지막 일정을 맞추느라 어젯밤부터 긴장돼서 힘이 많이 들었다. 거의 헉헉댔다. 원목 책꽂이를 사는데 판매자가 당장 오늘 가져가라고 해서 급히 용달을 수배했는데, 판매자가 시간 조율도 잘 안 해주고 답장도 느려서 애를 먹었다.


오후부터 숨이 잘 안 쉬어지는 상태로 첫 상담을 받았다. 이제 상담받기 시작한 지 20년이 되었다. 많은 도움이 되었고 나 자신과 내가 겪는 문제를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상담 가기 전에 이번 상담을 통해 해결하고 싶은 문제, 그리고 그 문제와 관련된 나의 경험과 배경을 다이어리 한 페이지 빼곡히 적어갔다. 이 한 페이지를 이야기하고 상담사의 질문에 대답하는 데에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이 과정에서, 나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쳤던 트라우마적 관계를 내가 잊고 싶어서 나도 모르게 통째로 들어내고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담사가 '혹시 이런 일은 없었냐'라고 물었을 때 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상담사는 '정서내성범위'에 대해 이야기했다. 정서내성범위는 개인이 강렬한 감정이나 스트레스를 해리, 폭발, 마비 없이 효과적으로 경험하고 조절할 수 있는 심리적 생리적 안정 영역을 말한다. 이 범위가 넓으면 부정적 상황 대처 능력이 높고, 좁으면 감정 조절이 어려워 정서 행동 장애를 겪을 수 있다. (구글에서 검색한 내용이다.)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지 않고 스스로 위로하며 자기 인식을 높이는 연습을 통해 내성 범위를 확장할 수 있다.=>이 부분을 어린 시절 양육자가 도와주어야 하는데, 나의 경우 그런 양육이 부재했고 주변 환경이 학대에 가까웠기 때문에 정서내성범위가 좁으며 안 좋은 쪽에 치우쳐있을 수 있다고 했다.

나:그래도... 많이 넓히고 안정화한 거라고 생각한다.

상담사:많이 노력하고 애썼고 잘 살아오신 것 같다.

나:그런데 왜, 이제 경제적으로도 관계적으로도 많이 나아졌는데, 최근에 신체화 증상이 더 심해진 걸까.

상담사:많은 노력과 경험을 통해서 애쓰고 적응해 왔지만 정서적으로는 어린 시절의 상태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그러니까 신체에도 부담이 쌓여서 이제 드러나는 것일 수 있다. 긴장이 너무 오래되어서 그런 거다.

(이제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드러났을까, 이제는 드러나도 견딜만하게 되어서 드러났을까 궁금했다. )

나:ADHD 진단을 받은 게 나와 가족들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병으로 너무나 많은 부분이 설명되었다.

상담사:성인 ADHD에 대해서는 최근 들어 알게 되었는데, 해당하는 부분이 많아 보인다. 별로 드러나지 않아서 더 힘든 부분도 많았을 거다. 이렇게나 힘든 일은 많은 사람이 겪는 건 아니다.

나:나 정도 힘든 사람은 많이 있지 않을까. 극단적인 환경도 아니었는데 이렇게까지 힘들어하고 오래 앓는 게 부끄럽기도 하다.

상담사:어떤 사람은 언니 오빠가 괴롭히고 구박하면 대들고 맞서 싸우고 욕하고 털어버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기질이 아니었고 아마 최대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착하게 지내야 했을 거다. 지능이 높으니 어떻게든 상황을 이해하려 했고, 눈치 보고 참았다. 하지만 어린아이였고 양육이 부재하고 여러 가지로 어려운 상황이었던 데다 ADHD까지 겹쳐 다른 사람은 겪지 않아도 됐을 법한 정서상의 어려움을 아주 많이 겪은 것 같다. 누가 날 괴롭히면 그 사람을 욕하면 되는데, 내가 안 태어났으면 좋았을 걸, 지금이라도 죽을까, 이런 생각으로 사고가 흐르는 게 그렇다. 이런 게 아주 많았을 거다.

결국 조금 울면서 상담을 마무리했다. 나는 아직도 이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이 나는구나 싶었지만, 전에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울면 여파가 3일도 일주일도 갔던 게 떠올랐다. 오늘의 여파는 3분 정도만 지속되었다. 나는 비록 2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지만, 아직도 많이 앓고 있지만, 많이 나아지고 편안해졌다. 노력한 나 자신을 인정하고 칭찬해 주었다.


그리고 상담사가 내 이야기를 얼마나 적극적으로 듣고, 이해하려 하는지 보면서 '아 내 고통에 대해 이제 친구들에게는 이야기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건 이런 병을 이해하는 사람, 그리고 듣기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 그리고 그 대신 돈을 받는 사람에게 할 이야기다. 친구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내 마음과 행동에 대해 듣고 웃거나 비웃거나, 그게 뭐냐고 비난하거나 판단하는 걸 많이 겪었다. 친한 친구들도 자주 그런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사실 나의 사고와 행동이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다는 걸 나도 안다. 게다가 극도로 안절부절못하며 애를 써서 겉보기에는 큰탈 없는 생활을 영위하고 있기에, '네가 뭐가 그렇게 큰 문제라고 징징대나' 정도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내가 상담을 받고 정신과에 다니고 신체화 증상으로 여러 병원에 다니는 것이 (그러나/게다가 다른 병원들에서는 이상도 없고, 오직 통증만 호소할 뿐이니 더더욱) 그저 꾀병으로만 보일 수도 있다는 것도 이해한다. 일도 안 하고, 한심해 보일 수도 있다는 것도. 누구보다도 가장 많이 나 자신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는 게 나이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그래 나의 병은 나의 병을 잘 아는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친구들과는 그들과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야지. 그게 서로에게 좋겠다.


저녁 내내 숨이 잘 안 쉬어진다.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그렇다. 하지만 10분 명상은 했다.

애 많이 썼다. 많이 애썼어. 나는 꾀병이 아니라 정말 앓았던 거야. 인정하자. 내 병을. 진심으로 인정하자. 나는 아플만했고, 아팠던 거다. 변명이 아니라. 그리고 나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많이 나아졌다. 잘했다. 헛짓거리가 아니었어. 나아지기 위한 거였어. 정말 잘했다. 정말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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