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1일이란 말인가. 2023년의?
2003년의 기억마저 또렷한데 20년 전이라고?
그렇구나.
시간은 무척 빨리 지나간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순간만이 나에게 주어진 것인데. 과거의 기억을 살고 있으니 지금은 또 스쳐지나 보내버린다.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다.
과거는 이미 지난 일이니, 머리로만 생각하기에는, 과거로부터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을 텐데. 마음은 쉽게 그리 움직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각오와 결단으로 그리 해 보자.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기.
나는 과거를 소재로 삼아 글을 완성할 욕심을 가지고 있다. 나의 과거 경험 중 그냥 흘려보내기에는 아까워서 글로 완성시켜 남들에게 재미와 생각거리를 주고 싶은 부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가족 구성원으로서 특수한 입장으로 태어났다. 나와 다른 가족 구성원들 간의 관계를 설명할 때면 상대가 이해하기까지 2~3분은 걸리는 경우가 많다. 나는 재혼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신데렐라도 신데렐라의 언니도 콩쥐도 팥쥐도 장화홍련도 아니다. 나는 재혼가정에서 새로 태어난 아이, 영어로는 mutual child라고 하는 공동자녀다. 특히 '엄마'가 없는 것이 치명적이고 숙명적인 결여로 여겨져서인지, 엄마도 아빠도 친부모인 나와 같은 입장에 대해서는 연구도 논문도 적은 걸로 알고 있다. (나의 입장을 털어놓았을 때 '어쨌든 너는 친부모님 밑에서 자란 거네?'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나는 '응... 그리고 나를 아주 미워하는 손위 이복형제들과 함께' 라는 대답은 하지 않았다. 너무 불행해 보일까봐.) 관련 내용이 언급된 논문의 저자에게 직접 연락해 보니 자기도 자료를 많이 찾지 못했다는 답신이 왔다. 영어권이나 유럽 쪽에는 연구가 더 있을지 모르겠다.)
어찌 됐든 과거의 나의 경험과 기억 등에 빠져 있어서는 좋은 작품을 쓰기가 어렵다. 거리를 두고 봐야 전체를 꿰어내고 다듬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전히 쉽지 않은 과제다. 이 글을 쓰는 것이 올해의 목표여서 나는 미리 많이 긴장해 있다. 게다가 심신이 무척 지친 상태로 불안장애 치료도 시작하는 마당이어서, 얼른 글에 투신하고 싶은 마음과 좀 더 쉬고 회복해야 한다는 마음이 싸우며 갈등하고 있다.
어제 요가 시간에 내가 '조금 덜 먹으니 요가가 더 잘 된다'라고 하자 다들 다이어트하냐고 물었다. 그래서 불안장애 약을 먹고 있다고 했더니 놀란 듯 '전혀 그렇게 안 보이세요' '평소에 웃기도 잘 하고 말씀도 잘 하셔서 전혀 몰랐어요' 하며 당황이나 위로의 뜻을 표했다. (30년쯤 되니 노하우가 생겨서 그렇게 티는 안 냅니다...) 또 '왜 이런 이야기까지 꺼내서 우리를 곤란하게 하지' 하는 듯한 기색도 보였다. 나는 곤란하게 하려던 건 아니고... 정신건강이 안 좋은 것이 부끄럽지 않다. 자랑할 일도 아니나, 적극적으로 치료받는 것은 알릴 만도 하다. 정신 건강은 몸의 건강에 비해 덜 다급하게 다뤄지곤 해서. 아니 대체로 건강한 사람도 발목이나 팔꿈치나 시력이나 간이 안 좋을 수 있듯이 나도 대체로 건강하지만 불안장애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혹시 내가 치료를 받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오 그래 나도 치료받아보는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바람이 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정신건강의학과 약을 먹거나 심리상담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솔직하게 한다.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사람 또는 정신병자로 본다고 해도 어쩔 수 없고 사실 상관도 없다. 그렇게 볼 사람은 어차피 내 사람은 아닐 것이다.
오늘 무척 힘들었어서 그런지 문장을 살필 여력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