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화, 상실 그리고 삶의 태도
삶은 덧없고, 죽음은 흔하다.
사람의 육체와 정신이 무너져가는 것을 본다.
한 할아버지가 처방전을 내밀었다. 복약지도를 한 후 계산을 마친다.
할아버지는 돌아갈 생각을 안 하고 뭔가를 기다린다. 혹시 필요한 것이 있냐고 묻자, 할아버지는 “계산을 하려고 한다”고 했다. 계산은 이미 끝났다고 말하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갔다. 몇 달째, 할아버지한테 비슷한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기억을 잃어가고 있었다.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이제 어쩌나, 혼자 사는 할아버지인데…
그 할아버지로 인해 몇 해 전 일이 기억났다. 약국을 오픈한 지 얼마 안 되던 시점이라 유독 기억에 남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었다.
할머니는 키가 자그마하고 예쁘장했다. 젊은 시절 엄청 미인이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얼굴이었다. 말도 얼마나 교양 있고 겸손하던지, 그냥 좋아지는 할머니였다.
할아버지도 키가 작았는데, 어느 정도의 근육질에 덩치가 좀 있었다. 둥그런 얼굴에 늘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혈혈단신 월남하여 할머니를 만났고, 젊은 시절 내내 세운상가에서 공구상을 했다고 했다. 공구상을 하면서 부부는 고생을 참 많이 했다고 했다. “그 시절을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서로 아껴주는 모습을 보면서, 늘 함께 하는 모습을 보면서, 서로 의지했기에 그 어려운 세월을 지나왔을 거라고 생각해 본다.
그 공구상이 제법 번창해서 돈을 꽤 모을 수 있었고, 상가 여러 개를 소유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가겟세를 받아 생활한다고.
노후걱정 없으니 부럽다고 하자, 두 분은 활짝 웃으며, 이제는 살만하다고 했다.
입을 가리며 웃는 할머니의 손을 유심히 바라다보니, 손마디가 엄청 두껍고, 손도 거칠다. 고생한 세월이 온통 손에 흔적을 남긴 듯했다. 할아버지의 손 또한 만만치 않게 투박하고 거칠다.
그렇게 몇 년을 두 사람은 우리 약국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처방약을 받아 가면서, 영양제든 음료든 뭐든 자꾸 사갔다. 아직은 남아 있을 텐데 의구심이 들어, 사간 지 얼마 안 된다 얘기하니, 썩지 않는 것이니 괜찮다며 웃는다. 뭐라도 팔아주고 싶은 마음에 사가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항상 함께 왔다. 젊은 시절은 어떠했는지 물어본다. 젊었을 때도 같이 장사하느라고 늘 붙어 있었다고 했다.
주말마다 취미로 등산을 다녔는데 그때는 지인들과 함께 다녔고, 나이가 들면서 차츰 지인들이 떨어져 나가고, 이후로는 늘 둘이서 산을 탔다고 했다. 우리나라 모든 산을 안 가본 곳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할머니는 날씬하고, 할아버지는 보기 좋게 근육질이다. 젊은 시절, 늘 산을 탔던 터라, 더 나이 들어서도 건강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할아버지 걸음걸이가 이상하다. 자꾸 절뚝거리면서 걷고 뒤뚱거린다.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힘겹게 부축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팔짱을 낀 채 힘겨워하는 할아버지의 걸음 속도에 맞춰 느리고 조심스럽게 걸었다. 그 느린 발걸음조차도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듯 보였다.
할아버지는 한의원도 다니고 종합병원도 다니면서 여러 검사도 받고 한약도 먹는다고 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세월이 흘러도 할아버지는 좋아질 기미가 안보였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이번에는 할머니가 이상하다. 할머니가 이미 계산이 끝난 것을 재차 계산했냐고 물으며 돈을 들이댄다.
당황한 할아버지가 절뚝거리며 다가와 말한다. 할머니가 자꾸 기억을 잃어간다고, 할아버지는 자못 비장하면서 괴로운 어조로 말했다. 할아버지가 계산이 끝났다고 말해도 할머니는 의아한 듯한 얼굴이다.
한 명은 육체의 기능을, 다른 한 명은 기억을 잃어가고는 있었지만,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니 그래도 다행이라고 나는 애써 생각했다.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노부부는 같이 약국을 방문했다. 여전히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부축한 채. 그런데 부부가 둘 다 기억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할아버지조차 기억력이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곳에서도 낸 돈을 또 내며, 여러 차례 계산하려 할까 봐 걱정되었다.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남에게 피해를 안 주려는 착한 심성이 보이는 듯해서 더 짠했다.
약국을 나서는 부부의 모습을 걱정스럽게 멍하니 한동안 쳐다보았다.
사람의 인생이 생로병사로 이어진다지만, 육체가 허물어지고, 기억을 상실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노부부는 젊은 시절, 엄청 체력을 잘 단련하며 살아왔음에도, 노후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모습에, 인간노력의 한계와 허무를 느꼈다.
처음으로 딸과 함께 공구상 노부부가 왔다. 거동도 불편하고 기억도 잃어가는 상황에서 노부부 둘만의 외출은 힘겹고 아슬아슬했을 것이다. 딸이 자신의 부모를 챙기며 약을 받아 들고나갔다.
여전히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부축하며 나선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의지한 채, 절뚝였다. 부부사이에는 서로 공유한 기억이 여전히 남아있을까.
그것이 마지막으로 본 부부의 모습이었다.
이후로 오랫동안 공구상 할머니, 할아버지는 소식이 없었다. 어느 날 문득, 궁금하여 의료보험 수진자조회를 하니 ‘장기요양등급’으로 뜨더니, 그로부터 몇 개월 후에는 ‘보험상실종류 / 사망자’로 떴다.
공구상을 했던 노부부는 나이에 맞지 않게 순수하고 해맑았었다. 그 나이 먹도록, 그런 고생 속에서, 어찌 그리도 순박하게 살아냈는지 신기했다. 가끔은 두 사람의 활짝 웃는 모습이 생각난다.
우리 약국이 있는 동네는 노인 인구가 많다. 그래서 환자의 과반수 이상이 노인이다. 그러다 보니 뜻하지 않게 노인들의 신체와 정신이 허물어져 가는 모습과 죽음을 많이 목격하게 된다.
늘 부부가 같이 오다가 혼자 오는 경우, 물어보면 배우자가 사망했다는 대답이 심심치 않다. 노령환자 중 거동이 힘들어지면서 요양원에 가는 경우도 제법 많다.
이처럼 어느 날, 나는 환자들과 뜻하지 않게 이별한다. 바로 며칠 전에도 봤던 사람이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인생은 한없이 덧없는 거라고, 한없이 가벼운 거라고.
환자로서 만난 인연이지만 그 쓸쓸함이 꽤 오래간다.
결국은 우리는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데, 살아있는 동안에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마치 자신은 죽지 않을 것처럼. 그런데 주변에 무수한 죽음이 보인다. 젊은 사람, 중년, 노년 할 것 없이.
생각보다 죽음은 흔하다.
그러면서 더욱더 생각해 본다. 지금의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미래의 나는 어떻게 노후를 살아내야 할지.
대자연 앞에서 인간은 한낱 미미한 존재이지만, 그래서 인간의 생로병사는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 아니 어쩌면 최소한의 노력이나마 해본다.
그것은 나의 생활습관을 다시금 꼼꼼히 돌아보며 고쳐나가는 일이다.
그런 후에는 진인사 대천명(盡人事待天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