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의 매화

생존과 번식, 각자의 방식으로

by 현주

봄의 시작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여니 나목들 사이로 하얀 송이를 달고 있는 매화가 보였다. 겨울의 나목들은 서로 잘 구분되지 않다가, 봄으로 접어들어 각자의 꽃을 피우면서 자신의 존재를 당당히 드러낸다.

요즘은 봄의 초입이라 출퇴근길에 산수유, 목련, 개나리, 매화가 눈에 많이 띄었다.

전에 살던 아파트 입구에는 커다란 꽃송이의 백목련과 자목련이 늘 봄을 알려주었다.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는 매화가 봄을 알려준다.

아파트를 거닐다 보면 백매(白梅), 청매(靑梅) , 홍매(紅梅)가 다양하게 피어있다. 지금은 나목이지만 아파트에 가장 많이 있는 심어져 있는 것은 벚꽃 나무다.


그런데 오늘 아침 커튼을 젖히는데, 벚꽃이 꽃을 피우려 준비하고 있다. 벚꽃 나무가 붉은빛을 내뿜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곧 벚꽃이 피어남을 알려주는 신호다.

벚꽃은 꽃잎 자체는 흰색이나 연분홍색이지만, 꽃잎을 감싸고 있는 꽃받침과 꽃자루는 진한 붉은색이기에, 꽃이 피기 직전 이 붉은 꽃받침들이 가지마다 촘촘하게 드러나면서 나무 전체가 붉게 물든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꽃은 인간을 위해 피지 않는다

이제 곧 진해에서 경주로, 다시 서울로 이어지는 거대한 벚꽃 퍼레이드가 시작될 모양이다.

우리는 그 화려한 축제에 사로잡혀 환호하지만, 식물이 그토록 아름답고 화려한 꽃을 피우는 이유는 생존과 번식이라는 절실한 목적이 담겨 있다.


대학 시절, 약용식물학이나 생약학을 배우며 마주했던 식물들의 번식 전략은 상상 이상으로 정교하고도 치열했다.

꽃은 화려한 색과 달콤한 향기로 벌과 나비를 유혹한다. 꿀이라는 대가를 지불하며 자신의 꽃가루를 다른 개체에게 전달하는 '타가수정'을 하려는 것이다. 이는 유전자의 다양성을 확보해 급격한 환경 변화나 질병에서 살아남으려는 고도의 전략이다.


그렇다면 작고 수수한 꽃을 지닌 소나무나 벼, 갈대 등은 어떻게 수정할까?

꽃이 화려하지도 않고 향기도 없는 이러한 풍매화(風媒花)들은 우리가 꽃인지도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바람에 꽃가루를 날린다. 바람에 날려 우연히 암술에 닿아야 하므로, 엄청난 양의 꽃가루를 만든다. 봄철 송홧가루(소나무 꽃가루)가 노랗게 쌓이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는 꽃가루 알레르기의 원인이기도 하다.


수분이 끝난 뒤 씨앗을 퍼뜨리는 방식 또한 경이롭다. 식물은 이제 씨앗을 멀리 퍼뜨리기에 집중하게 된다.

과일처럼 동물의 먹이가 되어 이동하거나, 도꼬마리처럼 몸에 붙어 이동하기도 한다.

민들레처럼 바람에 날려 가거나, 봉선화처럼 꼬투리가 터지면서 씨앗을 사방으로 발사하기도 한다.

연꽃처럼 물길을 따라 이동하다가 어딘가에 걸리면 뿌리를 내리는 식물도 있다.


식물이 이토록 다양한 방법으로 씨앗을 가능한 멀리 퍼뜨리는 이유는, 같은 장소에 있으면 햇빛과 영양분을 두고 서로 경쟁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 넓은 세상으로 자손을 보내 번식하려는 식물들의 지혜이다.


각자의 식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생존과 번식을 한다. 식물은 생물이지만 움직일 수 없기에, 자신의 한계에서 곤충과 새, 바람을 이용하고 움직이는 생명체를 이용하여 자신의 한계를 넓혀 나가는 것이다


우리라는 존재의 거대한 숨결

식물이 꽃을 피워 종족을 보존하려는 치열한 노력을 보노라면, 성경 창세기의 인류와 생물들에게 주신 첫 번째 축복이자 명령으로 "번식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이 떠오른다.


야산에 피어났다 조용히 사라지는 야생화도, 우리가 꽃인 줄도 모르고 지나치는 풍매화(風媒花)도, 심지어는 엄청 화려한 색깔과 향을 자랑하는 꽃들도 우리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이 세상에 왔을 뿐이다.


우리 인간의 삶도 이와 닮아있지 않을까. 누군가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 자신으로 오롯이 존재하다 가는 것이다.


죽은 줄 알았던 나뭇가지에서 해마다 새순이 돋고, 꽃을 피우는 것을 보면 매번 감탄하게 된다. 우주의 거대한 숨결과 생동감이 느껴져서 이다.

봄의 시작은 T.S. 엘리엇이 말했듯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며”, 땅과 공기의 흐름마저 따스함과 활력으로 채우며 다가온다.

우리의 움츠렸던 몸도 다시 기지개를 켜며 새로운 기운으로 꿈틀댄다. 자연의 순환에 따라, 몸도 마음도 기분도 바뀌어간다. 우리도 자연의 일부임을 깨닫는 순간이다.

올봄, 창밖 매화의 수런거림에 귀를 기울이며 나 또한 나만의 빛깔과 방식으로 충만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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