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일으키며 달리는 밤

다시 쓰는 건강의 기록, 청계천의 조명 아래 섞이는 일

by 현주

바람을 좋아하는 아이, 바람을 일으키는 어른

겨울 내내 건강악화로 잔뜩 움츠렸던 몸을 일으켜 세우고, 몇 개월 만에 청계천으로 향했다.

3월의 마지막날, 늦은 저녁의 봄날씨는 어느 정도 쌀쌀했다. 걷다 보니 추운 기운은 사라지고, 주변의 풍경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하늘에 구름과 달이 떠있고, 바람은 거의 없다. 나는 살짝 달려 바람을 일으킨다. 그 바람이 싫지 않다. 가벼운 바람 속에서 나무와 풀들 사이를 달려본다.


나는 바람을 어릴 적부터 무척이나 좋아했다. 바람의 결을 좋아했고 그 시원스러움을 사랑했다.

주로 봄에 동쪽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인 샛바람,

여름날 그늘 밑, 시원하고 가볍게 불어오는 바람인 산들바람,

소나기가 내릴 무렵, 세차게 부는 바람인 소낙바람,

가을에 외롭고 쓸쓸한 느낌을 주는 부드럽고 서늘한 바람인 소슬바람,

겨울철 목도리를 단단히 두르게 만드는 매서운 북풍 된바람,

사계절의 모든 바람, 하루하루의 그 모든 바람이 너무나도 좋았다.


내 생애 가장 강렬했던 두 번의 바람

그래서일까?

내 기억 속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바람의 추억이 있다.


하나는 고등학교시절이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산 하나를 타는 것처럼 높은 곳에 있었다. 교실옆쪽으로 커다랗고 울퉁불퉁한 바위가 있었는데, 아이들이 왕자바위라고 불렀다.

쉬는 시간마다 틈틈이 나는 친구와 왕자바위에 갔다. 마치 산정상에 있는 듯, 바위에 앉아있으면 아래로는 나무들과 건물들이 아득하게 보였다.

왕자바위에는 늘 바람이 불었다. 거의 언제나 세찬 바람이었다. 그 바람이 그렇게도 좋았다. 바람에 단발머리를 휘날리며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어찌나 많이 주고받았던지. 당시는 문학소녀요, 작은 철학자라도 된 듯했다. 책에 대하여, 종교와 철학에 대하여, 인생에 대하여 수많은 이야기가 오갔고, 그래서 더없이 충만했고 행복했다.

고등학교시절, 늘 바람과 함께 했던 왕자바위에서의 무수한 대화는 평생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또 다른 기억은 휴가와 얽혀있다.

여름휴가로 강원도 홍천에 갔다. 남편과 어린 아들과 함께한 가족여행이었다. 홍천 가는 길은 여름휴가철 성수기 답지 않게 도로가 한산했다. 태풍주의보 때문이었다. 태풍이 올라오고 있었고, 한낮의 하늘은 먹구름을 잔뜩 머금어 어둑했다.

휴가지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기 위해 음식점 바깥에 자리한 정자에 앉았다. 주문한 음식이 차려졌고, 바람이 불었다. 폭풍전야의 고요함, 아무도 없는 드넓은 식당의 정원을 배경으로 나무들이 일제히 물결처럼 흔들렸고 나뭇잎들은 파도소리를 냈다.

세찬 바람 속에서, 그 시원함 속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주변의 화려한 풍광을 우리 가족이 독차지한 기분이었다. 무릉도원이 아마도 이러했으리라.

이후 국내외 여러 곳을 여행했지만 그 해의 여름휴가는 나의 기억 속에서 태풍의 강렬한 바람과 함께한 잊히지 않는 인생휴가로 가슴깊이 남아있다.


다시 흐르기 시작한 몸, 건강이라는 진리

오랜만에 맞이한 청계천에서의 바람은 나의 기억 속의 바람들을 떠올리게 했다.


청계천의 어스름한 하늘아래 조명들이 빛을 발한다. 빛 아래로 사람들이 바람을 일으키며 달리고 있다. 그 역동적인 아름다움에 가슴이 뭉클하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다. 타인이지만, 때로는 예상치 못한 위로와 영감을 주는 존재들. 내가 아픈 사이 이렇듯 다들 활기차게 밖에서 걷고 달리고 운동했나 보다.

두 발로 걷고 때로는 달릴 수 있는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느낀다. 어둑한 저녁시간 이렇게 사람들 속에 섞여 같이 운동할 수 있음이 감사하다.


지난 연말 수술 후, 그 후유증으로 몇 달을 동면하듯 최소한의 움직임만을 유지한 채 몸을 사리고 있었다. 흐르지 않는 물은 썩듯이 활동 없는 나의 몸도 뭔가 자꾸만 엇박자를 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 후유증이 더욱 오래 지속되었던 듯하다.


나이가 들면서 필요에 의해 시작했던 운동이었지만, 그 운동을 몇 달간 쉬다 보니, 다시금 운동의 필요성에 대해 절감하게 되었다. 그동안 열심히 한 운동은 아니었지만, 격한 운동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저 소소하게 했던 운동이 나를 지탱하고 활력 있게 했음을 저리게 느꼈다.

"건강한 육체에서 건강한 정신이 나온다." 오래된 진부한 이야기가 비로소 진리처럼 가슴에 와닿는 밤이다.

3월의 끝자락, 나는 다시 나만의 바람을 일으키며 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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