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누구와 함께 할 것인가
관계는 언제나 우리에게 영향을 준다.
누구를 가까이 두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지기도 한다.
비행을 한 자녀의 부모님들이 학교에 와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우리 애가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다.
학교 현장에서 이 말은 낯설지 않다. 하지만 문제의 원인을 특정 친구에게만 돌리는 순간, 아이 스스로 관계를 성찰할 기회를 빼앗게 된다.
특히 선도위원회 자리에서는 이런 장면이 자주 펼쳐진다.
어느 날, 두 명의 학생과 두 어머니가 함께 위원회에 참석했다. 발언권을 얻은 한 어머니가 자녀 옆 친구를 향해 말했다.
“선생님. 우리 애가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마음이 약하다 보니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곧바로 옆 어머니가 맞받았다.
“우리 애는 너무 순진해서, 쟤를 따라 한 거예요!”
아이들에게 중요한 건 친구 자체가 아니라 그 친구와 맺는 관계가 어떤 영향을 주느냐는 점이다.
둘은 서로 재미있고 좋은 친구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우정이 희망이 아닌 일탈과 쾌락의 방향으로 흘렀다면, 그것은 해로운 관계다.
학생 때 교칙을 어기거나 벌 받는 일은, 성인이 되어 돌이켜보면 흔할 수 있다.
하지만 선을 넘어 법을 어긴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담배를 구하려고 친구와 편의점에서 절도를 저질렀다면— 이건 명백히 ‘잘못된 친구’의 사례다.
진짜 친구라면 그런 행동을 말렸을 것이고, 자신 역시 거기서 빠져나왔어야 했다.
어른이 된 뒤에도 '휩쓸려가는 관계'는 반복된다. 회식자리에서 원치 않는 음주를 권유받거나, 집단 분위기에 떠밀려 소모적인 경쟁에 끌려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큰아이 미취학 시절, 어린이 합창단에 보냈다. 반은 음악 교육, 반은 친구 사귀기를 기대했다.
그곳에서 여러 엄마들을 만났지만, 지금까지 연락하는 사람은 나를 합창단에 초대한 지인 한 사람뿐이다.
어느 날, 독서논술학원 원장님이라는 한 엄마가 내 팔목에 있던 작은 고무줄을 보고 말했다.
자기야, 이런 거 끼고 다니니까 안 되는 거야.
반쯤 내리깐 눈에는 무시와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
그 말은 처음엔 좀 신선하게 다가왔다.
내 주변 사람들은 손목에 무엇이 있느냐로만 사람을 판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알았다. 그 합창단의 일부는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평가한다는 걸.
합창단을 그만둔 뒤, 합창에 초대했던 선생님이 “그 원장님이 나를 보고 싶어 한다”고 연락을 주셨지만,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굳이 내 정서를 소모시키는 사람을, 이유 없이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 경험에서 배운 건 하나였다. 관계를 선택하는 눈이 필요하다는 것.
겉모습이나 조건으로 평가하는 시선은 어디에나 있다. 중요한 건 그 안에서 내가 나를 어떻게 지킬지다. 그런 관계는 나의 자존감을 서서히 갉아먹는다.
학생들을 상담할 때도 비슷하다. 조건으로만 평가받는 아이는 자기 모습보다 ‘보여지는 모습’에 맞추려 하고, 그 과정에서 자존감이 무너진다.
부모라면 누구나, 자녀가 해로운 친구를 멀리하길 바란다.
하지만 아이들은 같은 교실, 활동, 모임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난다. 피할 수 없다면, 적당히 지낼 사람과 가까이해도 되는 사람을 구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학생을 상담할 때도, 부모와 대화할 때도 느낀다.
결국 관계를 선택한다는 건, 곧 자기 삶을 선택하는 일이다.
나를 존중하는 사람 곁에 머물고, 나를 소모시키는 사람과는 거리를 두는 것.
관계를 선택하는 힘이 곧, 나를 지키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