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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아Sora Dec 19. 2022

할머니 혹시 죽고 싶으신 것은 아니죠

고혈압약 안 먹겠다는 할머니

병원에 입원을 한다는 것은 환자가 24시간 동안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병원이 어느 정도는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당뇨가 있는 환자에게는 식사도 주치의의 결정에 따라서 이루어진다.


즉, 밥도 환자 마음대로 먹을 수 없다.


주치의가 하루 총 섭취할 칼로리를 입력해 놓으면 영양사 선생님이 칼로리를 계산해서 아침 점심 저녁 식사의 구성이 채워지고 일반식을 먹는 환자와 구성이 달라진다.


이렇게 입원은 환자가 하루 종일 있으면서 여러 일이 발생할 수 있고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주치의가 어느 정도는 책임을 져야 되기 때문에 흔히 드라마에서 보는


"여기 주치의 어딨어!"


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어느 날 출근 전,

아침부터 전화가 온다.

"선생님  xx호 ㅇㅇㅇ님 7시 BP(blood pressure 혈압의 줄임말이다) 190/82입니다."


어제 입원한 할머니였는데 어제도 입원할 때 혈압이 좀 높았었다.


'오늘도 꽤 높네'라고 생각을 하며

출근하자마자 할머니 병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할머니께 여쭤봤다.


"Xxx분 혈압약 드셨어요?"


할머니는 장황한 대답을 시작한다.


"아니. 내가 원래는 혈압도 없고 당뇨도 없고 약 하나도 안 먹고 건강했어. 그런데 몇 년 전부터 혈압이 높게 나오더니 혈압약을 먹어야 한대.

그래서 먹었더니 이번엔 또 혈압이 너무 낮은 것 같아. 그 뒤로 몇 달 쉬었지. 그래서 혈압약 탄 곳에 가서 얘기했더니 그러면 반알만 먹자고 해서 반알만 먹는데     집에 있을 때는 괜찮았던 것 같은데 오늘은 또 왜 이렇게 높아."


(들어보니 어느 정도 그래도 수긍은 된다.)

나는 다 듣고 말했다.


"아 그러면 머리 아프거나 어지럽거나 그런 것은 없으시고요? 불편한 것은 없으세요?"


"응. 괜찮아. 원래 입원한 게 허리랑 다리 때문이었는데 허리만 아파."


"그래도 혈압이 높으니까 양방 원장님이랑도 상의해볼게요."


양방 원장님은 계속 재도 높게 나오면 혈압약을 1알 더 주겠다고 하였고 할머니 혈압은 고공 행진을 하고 있어서 원장님이 결국 혈압약을 새로 처방했다.


다 해결된 줄 알았는데 다시 전화가 온다.


"선생님 xx호 ooo님 아모잘탄정(혈압약) 안 드시겠다고 하셔서요."


나는 전화받자마자 또 성큼성큼 병실로 향한다.

'아니 왜 안 먹겠다는 거지'


이번에도 문을 열자마자 물어보았다.


"어머니!!! 혈압약 왜 안 먹으려고 하세요?"


"아니 나는 혈압이 집에서는 잘 나왔어."


"그래도 여기서는 높으시잖아요. 그리고 원래 1알을 드시던 것을 반 알로 줄이니까 다시 높게 나오잖아요. 다시 추가해야 돼요."


"아니 나는 혈압 괜찮았어."


(병원만 오면 높아지는 백의고혈압도 있다지만 아침 기상 후에 재도, 안정 후에 재도, 누워있을 때 재도 수축기가 180 190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협박으로 가기로 했다.)


"어머니 그러면 나중에 중풍이나 심장병 걸려요. 그때는 되돌릴 수도 없어요. 혹시 죽고 싶은 건 아니시죠?"


할머니는 "중풍"이란 말이 무서웠는지 꼬리를 내리고 이번에는 다른 핑계를 대신다.


"아휴. 그러면 평생 먹어야 되잖아. 나는 지금 반알 먹는데 한 알 더 먹으면... 아휴... 아휴..."


나는 이 기회를 틈타서 이번에는 협박 대신 회유의 말을 건네 보았다.

아무래도 주치의로서 혈압이 높은 것을 그대로 둘 수는 없다.

나중에 보호자들이 혈압이 이렇게 높은데 아무런 조치를 안하셨나요라고 듣기 무서운 것도 있었고

할머니가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어머니, 어머니 나이가 지금 86세이신데 어머니는 고혈압 하나만 있고 당뇨도 없고 뇌경색 뇌출혈도 없었잖아요. 어머니보다 젊은 나이인데도 혈압약 하루에 6알씩 먹는 할머니 할아버지도 많아요."


할머니는 알겠다고 대답을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대답은 알겠다고 하고 새로 처방받은 혈압약은 끝끝내 추가로 드시지 않았다.


결국 나는 아들한테 전화를 걸었다.


"아. 저희 어머님이 고집이 조금 있으셔요. 제가 그래도 최대한 설득은 해볼게요."


아들이 어떻게 잘 이야기를 하였는지 할머니가 결국 백기를 들었다.


물론 백기를 30도 정도만 드셨다.


새로 처방받은 혈압약은 먹지 않고 자기가 갖고 있는 혈압약 반알을 하루에 두 개(그러니까 0.5×2로 총 1알) 먹겠다고 했다.


혈압이 다 잡히지는 않았다. 여전히 아침 150, 160대가 나왔다.


다시 한번 할머니에게 물어보았다.


"어머니, 저희가 처방해드린 약은 못 믿겠어서 혹시 안 드시는 건가요?"


"아니 내가 원래 다니던 곳이 있어. 거기서 받으려고."


"네. 그러면 퇴원할 때 그동안 저희 병원에서 혈압 체크한 기록지 뽑아드릴게요. 꼭 이거 들고 가서 보여주고 약 다시 처방받으세요."


할머니는 내과에 제출할 소견서를 받아가셨다.


할머니는 죽고 싶어서 혈압약을 드시기를 거부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건강에 관심이 많으셔서 빨리 나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가 지금 먹고 있는 한약은 어떤 약인지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어르신들에게 혈압약을 먹는다는 것은 인생 성적표의 중요한 과목인가 보다.

마치 노화라는 수능의 국영수 같은 느낌인가 보다.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약이 각각

국어 낙제

수학 낙제

영어 낙제

이런 기분이신 걸까.


약을 먹는다는 것은 건강 과목에서 F학점을 받는 느낌인가 보다.


의료봉사에 가서

"혹시 고혈압이나 당뇨 있으세요?"라고 물어보면


할머니 할아버지는 자랑스럽게

 "어휴~ 나는 그런 거 없지~~."

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신다.


사실 혈압이라는 것도 좀만 과장하면 어느 정도는 노화의 과정이다. 그리고 혈압약이 개발되었기 때문에 인간이 심근경색 뇌졸중 등으로 자연사..하지 않고 이러한 질환들을 예방하고 혈압약 덕분에 오래 살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어르신들은

"평생 고혈압약을 먹는다"


"평생 당뇨약을 먹는다"는


인생의 큰 오점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나 보다.


물론 불안하고 질병의 자연사에 대해서 정보의 비대칭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공감이 간다.


나는 주치의로서 나중에 무슨 일이 벌어질까 긍긍하며 할머니의 혈압을 낮추는 데만 연연하고 있었다.



내가 의료인으로서 환자의 마음을 더 이해하고 더 보듬어준 다음에 고혈압이나 만성 질환에 대한 설명을 했어야 했는데


나도 모르게 할머니가 혈압약을 안 먹겠다는 점에만 집중하여 할머니의 마음을 충분히 공감해주지 못했나 반성이 드는 일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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