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Ⅱ』
36.
위선자가 되는 것- 거지는 모두 위선자가 된다. 그것은 마치 궁핍이나 긴급 상황으로 인해 (이것이 개인적인 것이든 공적인 것이 든 간에) 자신의 일을 행하는 모든 사람이 위선자가 되는 것과 마찬 가지이다.- 그러나 거지는 구걸로 생계를 유지할 경우에도 궁핍을 느끼지는 않는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Ⅱ』,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미기 옮김, 책세상, 2019. p.256)
가끔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마주할 때면, 그들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고, 그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알게 되어 불편함을 느끼기도 한다. 특히 약하고 궁핍한 이들에게서 보이는, 어딘가 모르게 부자연스러운 '가면' 같은 모습들을 볼 때면 더욱 그렇다. 왜 그들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걸까?
인간이 극한 상황에 놓였을 때, 자신의 본성을 숨기고 위선의 가면을 쓸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가 된다.
거지는 자신의 궁핍함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과장된 몸짓과 언어를 사용한다. 때로는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해 거짓된 이야기를 꾸며내기도 한다. 이는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존엄성을 포기하고 위선의 가면을 쓰는 행위이기도 하다. 나는 그들의 눈빛에서 복잡한 감정을 읽을 때가 있다. 생존을 위한 절박함과 동시에, 스스로에게 드리워진 위선의 그림자에 대한 미묘한 체념 같은 것 말이다. 그들은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자신의 진짜 모습을 숨긴 채, 타인의 시선을 통해 얻어지는 작은 온기에 기대어 살아간다.
이러한 위선은 단순히 특정 계층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인간은 궁핍이나 긴급 상황으로 인해 (이것이 개인적인 것이든 공적인 것이든 간에) 자신의 일을 행할 때 위선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다. 이는 인간이 극한 상황에 놓였을 때, 자신의 신념이나 가치관을 포기하고 생존을 위해 타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영화 <설국열차>에서 꼬리 칸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앞 칸으로 나아가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성을 저버리는 선택을 하거나,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위선적인 모습을 보이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이러한 행동은 극한 상황이 인간의 본성을 숨기고 위선의 가면을 쓸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는 불편한 진실을 드러낸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러한 위선이 반복되면 궁핍의 공포마저 사라질 수 있다는 니체의 통찰이다. 거지는 구걸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면서 더 이상 물질적인 궁핍의 공포에 시달리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위선의 가면을 쓴 채로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며, 자신의 행위에 대한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이는 인간이 극한 상황에 적응하고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보여준다. 처음에는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던 위선이, 점차 익숙해지고 심지어 편안함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섬뜩한 통찰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인간의 자기 합리화 능력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가. 겉으로 보이는 평온함 뒤에 숨겨진 내면의 공허함, 혹은 스스로를 속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또 다른 형태의 궁핍은 아닐까. 진정한 궁핍은 물질적인 결핍뿐만 아니라,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잃어버리는 데서 오는 정신적인 결핍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내 안의 위선, 그리고 진실된 삶을 향한 질문이다.
우리는 모두 살면서 크고 작은 궁핍이나 긴급 상황을 마주하고, 그 속에서 알게 모르게 위선의 가면을 쓰고 타협하기도 한다. 때로는 사회생활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생존이라는 명목으로 말이다.
나는 과연 극한 상황에서도 나의 존엄성을 지키고 진실된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까? 아니면 생존을 위해 위선의 가면을 쓰고 타협할 수밖에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