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Ⅱ』
12.
근본 오류- 인간이 어떤 정신적 쾌감이나 불쾌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환상 중 어느 하나에 지배되지 않으면 안 된다 : 그중 하나는, 특정한 사실들과 특정한 감정의 동일성을 믿어야만 한다. 그러면 그는 현재의 상태를 과거의 상태와 비교함으로써, 또 그것들을 동일시하거나 차별함으로써(모든 기억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정신적인 쾌감이나 불쾌감을 느낄 수 있게 된다 : 또 다른 하나는, 의지의 자유를 믿어야만 한다. 예를 들면 "이 일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것은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는데"라고 생각하면 거기에서 마찬가지로 쾌감이나 불쾌감을 느낄 수 있다. 모든 정신적 쾌감과 불쾌감에 작용하고 있는 이러한 오류 없이, 인간적 본질은 결코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ㅡ 인간이란 이 부자유의 세계 속에 있는 자유로운 자이고 선한 행위자이든 악한 행위자이든 그는 영원한 기적을 행하는 자이며 놀라운 예외자, 동물을 초월한 자, 거의 신과 같은 존재, 창조의 의미. 무시할 수 없는 자, 우주의 수수게끼에 대한 해답, 자연의 위대한 지배자이자 위대한 경멸자, 자신의 역사를 세계사라고 부르는 자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적 본질의 근본 감정이며 또한 근본 감정으로 남게 될 것이다. - 인간이란 헛되고 헛되도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Ⅱ』,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미기 옮김, 책세상, 2019. p.230)
우리가 느끼는 즐거움과 괴로움의 감정은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일종의 ‘착각’에 뿌리내리고 있다. 이러한 마음의 착각의 기저에는 크게 두 가지의 환상이 작동하고 있다.
첫 번째 환상은 ‘과거와의 동일시’라는 심리적 경향이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와 재회했을 때, 단순히 현재의 기쁨뿐만 아니라 과거에 그 친구와 함께 웃고 떠들었던 행복했던 순간들의 감정을 동시에 느낀다.
“맞아, 그때도 이렇게 즐거웠었지!” 하는 생각과 함께 현재의 기쁨은 더욱 깊어지고 풍성해진다. 반대로, 중요한 시험에서 좋지 않은 결과를 얻었을 때, 현재의 실망감과 더불어 과거에 비슷한 실패를 겪었던 좌절감까지 떠올리며 더욱 괴로워한다. 마치 오래된 사진첩 속 사진을 보며 당시의 감정이 되살아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은 현재의 감정에 과거의 경험이라는 특정한 색깔을 덧입혀 즐거움이나 괴로움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기억하는 행위는 단순한 과거 정보의 소환이 아니라, 현재의 감정 상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과거의 경험을 재구성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능동적인 과정이다.
두 번째 환상은 ‘자유 의지에 대한 믿음’이라는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적 경향이다. 중요한 발표를 망쳤을 때, “아, 그때 내가 좀 더 꼼꼼하게 준비했더라면 이렇게 실수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밀려오곤 한다. 이미 벌어진 일임에도 불구하고, ‘만약에’라는 가정을 통해 현재의 괴로움을 더욱 깊게 느끼는 것이다. 반대로, 어려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을 때, “만약 그때 포기했더라면 이 성취감을 느끼지 못했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현재의 만족감을 배가 시키기도 한다.
이미 흘러간 과거의 사건들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며, 당시의 상황과 맥락 속에서 불가피했던 선택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과거의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며 현재의 감정을 스스로 만들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