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함의 역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by 이시영

502. 겸손한 사람 – 인간들에 대해 겸손한 사람은 도시, 국가, 사회, 시대, 인류 등과 같은 일에는 불손함을 훨씬 더 심하게 보인다. 이것이 그의 복수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책세상, 2020. p.396)


우리는 겸손한 사람을 온화하고, 타인의 의견을 잘 수용하며,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그런 이들을 보며 우리는 편안함과 존경심을 느끼곤 한다.


니체가 말한 '인간들에 대해 겸손한 사람'은 아마도 개인적인 관계에서 자신을 낮추고,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며, 갈등을 피하려 노력하는 이들일 것이다. 그들은 직접적인 대면 상황에서는 온화하고 순종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러한 겸손함은 도시, 국가, 사회, 시대, 인류와 같은 거대한 집단이나 시스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심한 '불손함'으로 나타난다. 나는 이 '불손함'이 단순히 무례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오히려 그 거대한 시스템의 부조리함이나 불합리성에 대한 깊은 회의감, 비판 의식, 혹은 때로는 냉소적인 태도를 의미할 것이다.


나는 살면서 이런 사람들을 여러 번 목격했다. 예를 들어, 평소에는 누구에게나 예의 바르고 온화하며,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지 않는 친구가 있었다. 그는 직장 상사의 불합리한 지시에도 묵묵히 따르고, 동료들의 부탁도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천사' 같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하지만 어느 날, 우리는 함께 사회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다. 그 다큐멘터리는 특정 계층에 대한 불공정한 사회 시스템을 고발하는 내용이었는데, 영화가 끝나자마자 그 친구의 눈빛은 돌변했다. 그는 평소의 온화함과는 전혀 다른, 격앙된 목소리로 사회의 부조리함과 불공정함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 속에는 거대한 시스템에 대한 깊은 불신과 불손함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의 모습에서 니체가 말한 '겸손한 사람의 복수'를 보았다. 개인적인 관계에서 억눌렸던 그의 불만이나 비판 의식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거대한 시스템을 향해 분출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니체는 이러한 불손함을 '그의 복수'라고 표현한다. 나는 이 '복수'가 단순히 악의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것은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자신이 겪는 무력감이나 소외감에 대한 일종의 저항일 수 있다. 개인적인 관계에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거나 반항하기 어렵기에, 그 에너지가 더 추상적이고 거대한 대상인 사회나 국가를 향해 분출되는 것이다.


이러한 '복수'는 때로는 자기 방어의 메커니즘으로도 작용한다. 개인적인 관계에서 겸손함을 유지하는 것은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다. 타인의 기대에 맞추고, 갈등을 피하려 애쓰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의 본모습을 숨기거나 억누르게 된다. 이러한 억압된 감정들이 거대한 시스템에 대한 비판이라는 형태로 터져 나오는 것이다. '나는 너희들처럼 어리석지 않아', '이 사회는 잘못되었어'와 같은 외침 속에는 자신의 내면을 지키고, 스스로의 가치를 확인하려는 무의식적인 노력이 담겨 있을 수 있다.


나는 오늘, 나 자신의 겸손함과 불손함의 경계를 다시 생각한다.


나는 어떤 대상에게 겸손하고, 어떤 대상에게 불손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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