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519. 키르케(Circe)로서의 진리 - 오류가 동물에게서 인간을 만들어냈다. 진리가 인간에게서 다시 동물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책세상, 2020. p.400)
그리스 신화 속 마녀 키르케는 찾아온 인간들을 동물로 만들어 버리는 무서운 힘을 가졌다. 니체는 이 신화를 빌려와 우리에게 섬뜩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인간’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세상을 오해한 ‘오류’ 덕분이며, 만약 우리가 모든 ‘진리’를 알게 된다면, 키르케의 마법에 걸린 것처럼 다시 동물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나는 세상이 동화처럼 아름답고 정의로운 곳이라는 ‘오류’ 속에서 살았다. 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고, 착한 사람은 반드시 복을 받는다는 믿음. 이 순진한 오류는 나를 현실의 냉혹함으로부터 보호하는 울타리였고,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주었다. 그것은 나를 단순히 먹고 자는 동물이 아니라, 꿈을 꾸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노력하는 ‘인간’으로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가면서 나는 이 아름다운 오류들이 하나씩 깨지는 경험을 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고, 선한 사람이 오히려 고통받는 부조리한 현실이라는 ‘진리’와 마주해야 했다. 이 진실들은 고통스러웠다. 한때 나를 인간답게 만들어 주었던 이야기들이 힘을 잃자, 나는 때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저 본능에만 충실한 동물처럼 살고 싶다는 유혹에 빠지기도 했다. ‘어차피 세상은 이런데, 아등바등 노력해서 뭐 하나?’ 하는 냉소와 무력감이 나를 덮쳤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경고한 ‘진리의 위험성’일 것이다. 우리가 숭고하다고 믿었던 가치들—사랑, 희생, 이성, 도덕—이 사실은 생존을 위한 정교한 자기기만이거나 우연의 산물이라는 ‘진리’를 마주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될까? 우리를 인간이게 했던 모든 명분이 사라진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저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한, 다른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진리는 우리에게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하지만, 그 대가로 삶의 의미와 온기를 앗아갈 수 있다. 마치 키르케가 맛있는 음식과 술로 유혹한 뒤 인간을 돼지로 만들어 버리는 것처럼, 진리 역시 우리를 유혹하지만 그 끝에는 인간성의 상실이라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고통스러운 진실을 감당할 수 있는가? 아니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아름다운 오류 속에서 살아가는 편을 택할 것인가? 어쩌면 진정한 인간의 과제는, 진리를 알게 된 후에도 동물로 돌아가지 않는 것, 즉 의미 없는 세상에서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내며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