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명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by 이시영

522. 약한 양심 - 인류에 대한 자신들의 중요함에 관해 밀하는 사람들은 계약과 약속을 지키는 일 같은 일반적인 시민의 정직합과 관련해서는 약한 양심을 가지고 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책세상, 2020. p.400)


우리는 종종 ‘인류를 위해’, ‘더 나은 세상을 위해’와 같은 거창한 명분을 내세우는 사람들을 존경하곤 한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더 높은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막연히 기대한다. 니체는 이러한 인물의 이면에 숨겨진 불편한 진실을 꼬집는다. 그들이 거대한 목표에 몰두하는 사이, 정작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약속과 정직함은 쉽게 저버린다는 것이다.

대학 시절, 나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열정으로 가득 찬 한 선배를 동경한 적이 있다. 그는 언제나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거창한 계획들을 이야기했다. 나는 그의 원대한 비전에 감명받았고, 그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사명감을 지녔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나는 혼란에 빠졌다. 그는 ‘더 큰 일’을 해야 한다며 회의 시간에 늦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프로젝트에 필요한 돈을 빌려 가서는 갚는 날짜를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내가 사소한 약속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면, 그는 “지금 그런 작은 것에 얽매일 때가 아니야. 우리는 더 중요한 일을 하고 있잖아”라며 오히려 나를 속 좁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에게 ‘인류’라는 거대한 목표는 일상의 사소한 약속들을 어겨도 되는 면죄부와 같았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불특정 다수인 ‘인류’를 사랑했지만, 정작 눈앞에 있는 동료와의 약속은 가볍게 여겼다. 그의 양심은 ‘인류애’라는 거대한 영역에서는 예민하게 작동했지만, 돈을 갚고 시간을 지키는 ‘일반적인 시민의 정직함’ 앞에서는 이상할 만큼 무뎌졌다.

어쩌면 거창한 명분은 자신의 비도덕성을 가리는 가장 편리한 방패일지도 모른다. ‘세상을 구한다’는 대의 앞에서는 개인에게 진 빚이나 사소한 계약 위반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결국 한 사람의 진정한 도덕성은 그가 얼마나 위대한 목표를 말하는가에 있지 않다. 오히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얼마나 성실하게 자신의 약속을 지키고 정직함을 유지하는가에 달려있는 것은 아닐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문화가 문화를 파괴하는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