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524. 인간멸시 – 인간을 경멸하는 가장 노골적인 표시는 모든 사람을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인정하거나 또는 전혀 인정하지 않는것이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책세상, 2020. p.401)
누군가를 경멸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경멸이란 노골적인 무시나 혐오의 표현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니체는 가장 확실한 경멸은 훨씬 더 교묘하고 차가운 방식으로 드러난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타인을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나 ‘도구’로만 여기는 태도다.
10여 년 전, 함께 근무했던 한 상급자가 떠오른다. 그는 나의 열정과 능력을 칭찬하며, 중요한 업무들을 믿고 맡겼다. 나는 그 인정을 받는다는 기쁨에, 밤낮없이 일하며 성과를 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상급자는 나의 헌신에 만족해했고, 나는 그가 나의 노력을 정당하게 평가해 줄 것이라 굳게 믿었다.
하지만 정기인사에서 나보다 훨씬 적은 일을 하면서 상급자에게 아부만 일삼던 다른 직원이 더 높은 점수를 받아 승진을 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상급자는 나라는 사람 자체를 인정한 것이 아니라, 조직의 성과라는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만 나의 능력을 이용했던 것이다. 나의 가치는 나의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쓸모에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니체가 말한 가장 노골적인 인간 멸시다. 그는 나에게 단 한 번도 욕을 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지만, 그의 행동은 그 어떤 비난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남겼다. 나는 한 명의 인격체가 아니라, 잘 쓰다 버려진 도구에 불과했다.
이러한 태도는 비단 직장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때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수단으로 친구를 찾고,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배우자를 선택하기도 한다.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대신, 나의 필요와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여기는 것이다.
니체의 통찰은 나에게 묻는다. 나는 타인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는가, 아니면 나의 성공과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만 여기고 있는가? 타인을 도구로 여기는 순간, 우리는 가장 깊은 방식으로 그 사람의 인간성을 경멸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