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536. 시시한 상대의 가치 – 사람들은 때때로 상대가 끊임없이 시시하게 구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어떤 일에 충실하게 된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책세상, 2020. p.404)
우리는 일반적으로 누군가에게 충실하려면 상대방이 존경스럽거나 훌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니체는 오히려 그 반대의 상황을 지적한다. 상대방이 끊임없이 '시시하게' 굴 때, 그 부족함과 무능함이 오히려 우리를 그에게 더 헌신하게 만드는 역설적인 힘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는 상대방의 결핍이 우리의 존재 이유를 채워주는 심리에서 비롯된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학창 시절, 발표 준비를 할 때의 경험이 떠올랐다. 조별 과제 발표를 앞두고 조원 중 한 명이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고 끊임없이 시시하게 굴었다. 나는 처음에는 그에게 실망하고 화가 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아니면 이 조별 과제는 망한다'는 책임감이 나를 움직였다. 그의 무능함이 오히려 나의 능력을 더 크게 발휘할 동기가 된 것이다. 나는 발표 자료를 혼자 다 만들고, 발표 연습까지 도맡아 했다. 그의 시시함이 나를 더 열심히 하게 만들었고, 결국 우리 조는 좋은 점수를 받았다. 나는 그에게 감사함을 느끼진 않았지만, 그의 존재 때문에 내가 이 과제에 충실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일상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잔소리를 하는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다. 부모는 아이가 끊임없이 시시하게 행동할 때, '내가 아니면 안 돼'라는 생각으로 잔소리를 멈추지 않는다. 상사 역시 무능한 부하 직원의 부족함을 채워주기 위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는다. 이처럼 상대의 부족함은 우리의 존재 이유를 강화하고, 그들을 '돌봐야 하는 대상'으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그 관계에 묶어둔다.
니체는 이러한 심리의 이면에 있는 허영심을 꼬집는다. 우리는 상대가 시시할수록 '나는 저 사람보다 뛰어나다'는 우월감을 느끼고, 그 우월감을 유지하기 위해 그 관계에 더 충실하게 된다. 상대의 시시함은 우리의 능력을 증명하는 배경이 되고, 우리는 그 배경이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