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537. 직업의 가치 - 직업은 깊이 생각할 수 없게 만든다. 그 점에 직업의 가장 큰 은총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반적인 종류의 회의와 걱정이 어떤 사람을 엄습할 때 사람들이 그 뒤로 마음대로 피신할 수 있는 울타리이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책세상, 2020. p.404)
니체는 직업의 가장 큰 가치가 오히려 '깊이 생각하지 않도록' 돕는 데 있다고 말한다. 직업은 삶의 본질적인 고민이나 존재론적 불안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는 일종의 '울타리'가 되어준다는 것이다.
30년간 공공도서관 사서로 일했던 나에게 이 문장은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직장 생활을 막 시작했을 무렵, 나는 삶의 의미나 존재에 대한 고민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매일같이 쏟아지는 대출·반납 업무와 도서 정리, 복잡한 민원 응대 속에서 그런 고민들은 자연스럽게 뒷전으로 밀려났다. 바쁜 업무에 치여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면,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질 틈조차 없었다. 은퇴를 앞두고 잠시 휴가를 보내며 문득 그런 고민들이 다시 나를 찾아왔지만, 곧 다시 업무로 복귀하면서 안정을 찾았다. 30년간의 공직 생활은 나에게 단순히 봉급을 주는 수단을 넘어, 불안한 생각들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안전한 피난처였다.
이러한 직업의 역설적인 가치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바쁜 일상 속에서 삶의 의미를 묻거나 불안해할 틈도 없이 살아간다. 그들은 일이 끝나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다음 날 할 일들로 머릿속을 채우며 존재의 공허함을 잊는다. 직업이 주는 반복적이고 구체적인 과제들은 우리에게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야 할 이유'를 제공하고, 이를 통해 우리는 삶의 불확실성으로부터 잠시나마 멀어질 수 있다. 직업은 우리를 깊은 생각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일상이라는 무대 위에서 안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니체의 이 아포리즘은 우리에게 직업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직업의 가치는 단순히 경제적 안정이나 사회적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존재의 무의미함에 압도당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보호막에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직업을 통한 깊은 성찰이나 성장을 포기하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니체의 통찰은 우리가 직업에 대해 가지고 있는 낭만적인 환상에서 벗어나, 그 현실적인 기능 또한 직시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직업은 양날의 검과 같아서, 우리를 보호하는 동시에 우리의 사고를 멈추게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직업이 제공하는 안정 속에서, 때로는 그 울타리를 잠시 벗어나 삶의 본질적인 질문들을 마주할 용기를 가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