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역학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by 이시영

584. 정열의 비등점 - 막 분노 또는 심한 사랑의 격정에 빠지려는 사람은 영혼이 하나의 그릇처럼 가득 차게 되는 한 점에 이른다 : 그러나 아직 정열의 좋은 의지(사람들은 대개 나쁜 의지라고 부른다 )라는 물방울 하나가 더해져야만 한다. 그것에는 작은 단 하나의 물방울이 필요할 뿐이고, 그러면 그릇은 넘쳐 흐르기 시작한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책세상, 2020. p.416)


감정의 그릇은 하루아침에 채워지지 않는다. 그것은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 약속 시간에 매번 5분씩 늦는 무심함, 나의 의견을 가볍게 무시하는 태도, 혹은 반대로 나를 향한 작은 미소와 따뜻한 격려, 곤란할 때 말없이 건네준 도움의 손길 같은 것들이 오랜 시간 축적된 결과물이다. 각각의 사건은 그 자체로 너무나 미미해서 그냥 지나치기 쉽다. 하지만 그 미세한 입자들은 영혼의 그릇 안에서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퇴적물을 이룬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우리는 우리의 감정 수위가 위험할 정도로 차오르고 있음을 명확히 인지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저 ‘오늘은 왠지 기분이 좋지 않다’거나 ‘요즘 그 사람이 자꾸 신경 쓰인다’고 막연히 느끼며, 내면의 수위 변화를 애써 외면하려 한다.


감정의 폭발은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수많은 전조와 복선을 품고 있는 지극히 필연적인 과정에 가깝다.

그릇을 넘치게 하는 것은 거대한 파도가 아닌, 지극히 작은 물방울 하나다.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던 상사의 계속된 농담에 애써 웃어넘기던 어느 날, 회의실에서 툭 던진 비아냥거림 한마디에 결국 폭발해버렸던 경험이 있다. 돌이켜보면 그 말 자체는 이전의 무례함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그것은 내 감정의 수위를 결정적으로 넘게 한 마지막 방아쇠였다. 니체가 이 물방울을 ‘정열의 좋은 의지(사람들은 대개 나쁜 의지라고 부른다)’라고 표현한 지점은 특히나 흥미롭다. 우리는 보통 그 마지막 계기를 '나쁜 것'으로 규정하며 상대방이나 상황을 탓한다. 하지만 니체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억눌려 있던 정열이 마침내 스스로를 드러내고 표출되기 위해 선택한 필연적인 출구다. 정열 자체는 선악의 판단을 넘어선 생명력이다. 오랫동안 품어온 사랑이 상대의 사소한 친절 하나에 "좋아해"라는 고백으로 터져 나오듯, 그 한 방울은 억압된 감정의 본질을 세상 밖으로 이끌어내는, 어쩌면 가장 정직한 촉매제인 셈이다.

그릇이 넘쳐흐르는 순간, 우리는 당황하고 때로는 후회하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순간을 맞이한다.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날것의 감정은, 그동안 우리가 외면하고 있던 내면의 진실을 남김없이 보여준다. 넘쳐흐른 내용물을 통해 비로소 그릇 안에 무엇이 그토록 가득 담겨 있었는지 명확히 알게 된다.


나의 분노는 존중받고 싶다는 강한 욕구를, 참아왔던 눈물은 위로받고 싶었던 나의 연약함을,

갑작스러운 사랑 고백은 함께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비로소 깨닫게 한다.

감정의 폭발을 무조건 억제하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내 안의 그릇이 언제, 무엇으로 채워지고 있는지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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