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 내 잘못이 아니다 _ 7화
“이번 달까지 정리해라! 보름치 보전해 줄게.”
마치 날 위하는 일인듯 멋쩍게 말하는 K 대표의 뻔뻔함에 기가 찬다. 느닷없는 정리해고의 부당함과 무례함을 토로하는 나에게 '넌 이 사건의 본질을 모르고 있어.'라고 말한다. 무슨 개소리인가? 본질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알고나 하는 말인가? 그런 것 따위는 알고 싶지도 않다. 나 또한 가시 돋친 말들을 내뱉는다.
“넌 나를 끝까지 나쁜 사람을 만드는구나?!”
분노에는 분노가 돌아온다. 능구렁이처럼 넘어가려던 K 대표도 나의 반격에 당황했음이 느껴진다. 목소리가 격앙되고, 얼굴색이 벌게졌으며 이후 내가 퇴사하는 날까지 K 대표는 회사에 나타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남자들의 유치함이란 나이도, 사회적 지위도 아무 상관없이 없이 그들을 천둥벌거숭이로 만들어 버린다다. 우매하기 그지없는 저 인간을 위대한 선장이라 믿고, 이 배에서 허비한 나의 4년이란 시간이 아깝게 느껴질 뿐이다. 2월 말이라면 채 15일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광고 회사의 시즌 특성상 직원을 내보내는 적기는 3월이다. 염치없는 이 계획은 L 국장의 머리에서 탄생했고, L 국장이 나에게 통보해야 되는 일이었으나, 차마 그럴 용기가 없었던 L 은, 아마도 K 대표에게 세상 안쓰러운 모습으로 동정을 이끌어 냈을 것이다. L 국장이 나에게 해코지라도 당할까 봐 K 대표는 본인이 나선다고 했을 것이 안 봐도 비디오다.
나의 내면에 꾹꾹 눌러 놓았던 분노와 악한 기운이 마구 뿜어져 나온다. 나의 악마를 소환한다. 사람을 마모된 부품 갈아 치우 듯, 기력이 다한 건전지들 갈아 끼우듯,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 못된 것들에게 나는 더 이상 앉아서 당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이런 방식으로 잔혹하게 내칠 거였으면 ‘가족 같은 회사’란 소리를 애초에 하지나 말 것이지. 기울어진 배는 이제 언제 침몰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나의 악마와 함께 퇴사에 대해 합리적인 조건을 세웠다. L 국장에게 나의 요구 조건을 통보한다. 나의 요청에 대한 수긍과 함께 L 국장도 제시할 조건이 있다고 한다. 하찮게도 그는 외부에 보일 그들의 낯짝에만 신경 쓰고 있었다. ‘부당 해고’라는 소리를 외부로 퍼트리지 않겠다고 약속해 달라는 것이었다. 외부에 그런 소문이 퍼지면 서로 이미지가 실추된다는 이유였다. ‘천만에! 너의 이미지가 실추되겠지…’
양의 탈을 뒤집어쓴 L 국장은 ‘난 이 사건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어’라는 듯 눈시울을 적시며 말을 이어간다. 꼴 사나운 악어의 눈물.
나 : 전 앞으로 패션 광고와 관련된 일은 하지 않을 거예요. 저랑 마주칠 일도 없을 테니, 걱정 마세요.
L 국장 : 이 실장... 정말 미안하다. 내가 더 잘 살폈어야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K 대표가 그렇게 갑자기…, 이 실장에게 그럴 줄은 정말 몰랐다. 그날 그러게 왜 지각을 했어?
나 : 지각이요? 지각!? 지금, 지각해서 잘린 거라고 말하시는 거예요?
난 폭발하고 말았다.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곳에서 그 많은 일들을 해내면서 흘린 피와 깎아낸 살이 얼마나 괴로운 고통이었는지 감히 알고나 하는 소리인가? 작년에 엄마를 잃고, 그것이 회사에 조금이라도 누가 될까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 지금 지각을 운운하다니…. 나는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고야 만다.
L 국장 : 이 실장…, 아니 그게 아니고…, 아이고…, 내가 말실수했다.
말실수라고? 저 아무 말이나 해대는 세치 혀를 잘라내어 잘근잘근 씹어 뱉어야 속이 시원하겠다.
다음날부터 대 놓고 지각했다. 회사에서 뭐라고 하든 말든, 사회적 모범을 보여야 하는 이유도 의무도 더 이상 나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출근하고 퇴근까지 개인 업무만 본다. 바쁘게 마지막 날들을 보냈다. L 국장의 눈엣가시였으리라.
나의 마지막 출근 날, L 국장은 내 책상 위에 조그만 상자를 하나 남겨 두고 일찌감치 도망쳤다. 포스트잇에 쓰인 이별 문구는 이러했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아서, 무엇을 고를지 먹어보기 전엔 알 수가 없다. 그동안 고생했다. 이 실장! ’
영화 ‘포레스 검프’의 명대사가 쓰인 초콜릿 상자. 나의 똥 손은 운이 지지리도 없어서 고르는 족족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이것은 내가 운이 없어서 당하는 ‘인생의 쓴맛’이라는 것은 네가 알려주지 않아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이 연극의 마지막 장에서까지 순진한 역할인 척하고 싶은 L 국장이었다. 정 그러고 싶다면 평생 그렇게 사시구려! 침몰하는 너희들과 나는 이제 상관없는 사이니. 눈물 흘리면 배웅하는 몇 친구들과 마지막 인사를 하고 미련 없이 돌아선다. 이제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날지 모르지만, 다시 만나더라도 지금 이 모습은 아닐 거야. 나는 새로 태어날 거야! 모두들 안녕! 미련한 노예들아!
내가 내 이름을 지을 수 없는 곳, 안녕
내가 내 병명을 지을 수 없는 곳, 안녕
내일 아침은 내 침상에서 새 질병으로 태어날 거야
그 질병에 나를 꽂을 거야
그러니 모두 안녕
이제 마이너스 당신이 된 당신님도 안녕
김혜순 시인의 ‘아침인사’의 마지막 구절이 절절하게 와닿는 이유는, 그것이 무엇으로 태어나든(질병이라 하더라도), 마이너스뿐인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새 아침이 드디어 나에게도 찾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안녕? 나의 새로운 날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