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 내 잘못이 아니다 _ 6화
나에겐 놀라운 능력이 있다. 그것은 나의 사주팔자에도 나와 있다. 믿기 싫음 안 믿어도 상관없다. 어쨌든 내가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소리다. 왜 그러겠는가? 정글 같은 이곳에서 그런 능력은 몹쓸 것이다. 그것은 당장 내다 버려도 좋다.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치명적이다. 그것은 바로 ‘타인을 불편하게 하는 능력’이다.
이 회사에 디자인 실장으로 합류한지 벌써 3년이 지났다.
“넌 대장 기질이 있어! 그것 때문에 널 뽑은 거야. 우리 L 국장은 너무 물렀거든. 그래서 애들이 만만하게 봐. 너무 착해서 애들한테 맨날 당해요. 그런데 네가 애들 잡으면 찍소리도 안하지? 너는 그런 능력이 있어. 아빠같이! 그럼 L 국장이 엄마 노릇하면 되는 거지. 채찍과 당근이 환상의 짝꿍을 이루는 거야!”
K 대표는 회식자리에서 술에 취해 곧잘 이런 소리를 나에게 했다. 남들이 들으면 그의 큰 그림에 나의 역할이 중대하다 강조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나에게는 이 계획이 완벽하다 믿고 싶은 자의 자기 최면으로 들렸다. 하지만 원한다면 충분히 그 역할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겐 있었으므로 문제될 건 없었다. 고작 맥주 한 잔이 주량인 그 착한 L 국장은 이미 술집 한 켠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 K 대표가 말하는 대장 기질은 곧 그가 인식하지 못하는 나의 ‘그 능력’이었고, K 대표는 나의 그 기질이 이 회사의 분위기에 필요 악이라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몸담는 마지막 회사라고 생각했기에 그들의 기대를 최대한 맞추자는 일념으로 버텼다. 그렇게 자연스레 모두가 불편해 하면서도 신뢰하는 이 실장이 되어있었다.
그 착하디 착하다는 L 국장은 다소 이상한 버릇이 있었는데, 사내 채팅을 이용해 새로 들어오는 직원에게 석 달 정도 인내심을 시험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거부할 수 없는 간단한 일을 매우 복잡하게 처리하도록 지시하고 그 일을 마음에 들도록 처리하지 못하면, 갖은 핍박과 모욕을 해대는 그것은 그만의 ‘신고식’ 같은 것이었다. 할 일 없는 상사가 벌이는 우스개 짓이라 생각하면 석 달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간다. 하지만 예민한 친구들은 쉽게 받아넘기지 못하고 걸려 넘어진다. 얼마전 새로 온 S 대리가 지금 그 시험대에 올라 있었다. S 대리는 이 기이한 상황이 괴로워 더 이상 못 견디겠다고 나에게 털어 놓았다. 그리고 퇴사 의사를 밝혔다. 나는 S 대리를 다독이고 이 상황을 개선해 주겠다 약속했다. 그리고 개선이 안되면 나도 너와 함께 퇴사 할 것이라 말했다. 이것은 진심이었다. 이런 웃기는 문제로 사람을 잃는 다는 것은 나의 자존심도 허용할 수 없는 문제였다.
참고로, 나보다 세 살이 많은 L 국장은 늘 다정하고 유머가 넘치고, 무엇에나 관심이 많아 매우 수다스러웠다. 마치 태어나면서도 그랬고 앞으로도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처럼 행동한다. 주책스럽고 만만하게 보이는 그의 행동. 그것이 그가 이 정글에서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그는 만혼으로 얻은 외동 아들을 위해 대출을 받아 아파트로 이사를 해야 하는 기로에 놓였 있었으며, 그러기 위해선 회사에서 월급을 받으며 끝까지 남아있어야 하는 절실함이 충만한 이 회사의 이인자였다.
나는 가능한 부드러운 어조로 L 국장에게 대화를 요청했다. L 국장도 경력자가 매우 귀한 상황인 것을 알고 있었고, 혹여 회사의 처우에 문제가 있다면 고치면 된다고 평소 말해왔던 터였기에 나는 가식없이 L 국장과 진실한 대화를 나누어도 당연히 그는 이해 할 것이라 생각했다. 나의 순진한 생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소위 그 ‘신고식’ 문제를 언급한 나에게 L 국장은 공격적으로 돌변했다.
L 국장 :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나 때문에 관두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야? (잠시 침묵) 이 실장 그거 알아? 작년에 나간 B 대리 너 때문에 관둔 거? 그리고 지금 기획팀 애들도 다들 나간다고 난리인데, 이유가 다 이 실장 때문 이래. 내가 이 것까지는 말 안하려고 했는데. 이 실장이 먼저 말을 꺼내니 나도 이 말을 할 수 밖에 없네.
나의 몹쓸 능력이 정확히 발휘됐다. 억울함, 죄책감, 배신감 복잡하게 얽힌 감정들은 나를 밤 새 눈물짓게 만들었다. 한 밤중에 K 대표에게 전화가 왔다. 여전히 술에 취한 목소리다.
K 대표 : 오늘 저녁에 L 국장이 힘들어하면서 나한테 전화했더라.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도 난 너를 응원한다. 그런 능력이 없으면 어떻게 팀을 지휘하겠어? 걱정 하지마. 그 정도로 나간다는 애들 다 나가라 그래. 그런 애들은 키워 줄 필요도 없어.
이분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그 모든 게 사실이라고 믿고 있단 말인가? L 국장의 입에서 나온 말들을? 이미 바닥까지 곤두박질친 나의 정신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L 국장은 진실을 말하는 나를 매우 불편하게 느낀 것이다. 그 불편한 진실은 곧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었으므로, 나에게 선 빵을 날린 것이다. K 대표와 L 국장은 다음날부터 하루 종일 개코쥐코하기 시작했다. 며칠이 지나자 나를 응원한다던 K 대표의 태도는 180도 달라져 있었다. 진상을 곰곰이 파내어 알리려 할수록 나를 더 옥죄는 그들의 태도에 곧 대항할 힘도 의지도 없어졌다. 나는 제물이 되었다. 이제 곧 집행 될 화형식을 기다린다. 내 인생에 마지막 회사라고 생각했는데, 어처구니없는 마녀사냥으로 막을 내리다니. 이런 불명예가 또 있으랴? 그 동안 L 국장의 선한 가면에 속아 사적인 것들까지 의논했던 내가 한없이 어리석게 느껴진다. 나의 고민들은 그에게 유용한 무기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L 국장의 가면 뒤엔 꼼수와 공갈로 자기 먹을 먹이만 확보하면 되는 구더기 인간만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생각하지 마라! 이것이 내 열한 번째 계명 이지, 잘 수 있을 때 자라는 건 내 열두 번째 계명이고, 이런 또 생각을 하고 있군. - 허먼 멜빌 <모비딕> 중
사회는 정글, 바다, 사막 같은 곳이다. 생존이 유일한 이유인 무자비한 폭력과 잔인함이 난무하는 곳이다. 살아지는 대로 살면 구더기 인간에게 조종은 당하겠지만 내 한 몸 뉘일 수 있는 곳이 생기고, 노동으로 인해 달콤한 수면에 빠져 들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잔혹함에 대해 한번이라도 ‘생각’이란 것을 하기 시작하면 이곳에 제정신으로 남아 있을 자가 있을까?. ‘타인을 불편하게 하는 능력’은 내가 옳다고 믿는 것에서 발현된 ‘생각’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이 미숙했던 나는 관계를 자체를 불편하게 만들어 버렸다. 포장이 안된 말은 옳던 그르던 의도를 무시한 채 늘 다른 곳에 꽂히기 마련이니까. 빗나갔을 때의 처참한 결말은 타인이 아닌 늘 내가 감수하지 않았던가. 나의 ‘그 능력’을 감추고 사는 것보단 잘 빚어 동그랗게 만들어 가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최고의 악인 이라면 두말 필요없이 따귀를 올려 붙이는 것이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