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 내 잘못이 아니다 _ 5화
여성 암 분야에 ‘명의’로 소문났던 엄마의 담당 교수님이 뉴스에 나온다. 엄마의 수술 경과를 보러 적어도 하루에 한차례는 방문하던 그분이 병실에 나타나지 않은지 며칠이 되었다. 이유를 묻는 우리에게 명의 대신에 웬 꼬맹이가 와서 일이 생긴 교수님을 대신해 당분간 엄마를 담당할 거라고 했다. 수술을 집도하던 당시, 그 명의는 S 병원의 리베이트 문제에 휩싸여 있었는데, 경찰 수사가 들어오자 도망을 간 것이었다. 엄마는 참 운도 없지. 의사가 그 모양이었으니, 수술실에서 제정신이었겠는가? 환자를 그렇게 버리고 도망가는 의사는 면허를 취소해야 당연하다.
의사와 병원에 대한 나의 불신은 그렇게 시작됐다. 엄마의 상태는 항암치료는 생각도 못 할 정도로 약해져 있었다. 이미 번질 대로 번진 산불처럼 엄마의 암세포는 몸 여기저기서 생기고 사라지고를 반복하고 있었고, 좀처럼 잡히지 않는 그 불길은 몸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엄마를 담당하는 교수는 수차례 바뀌었고, 바뀐 교수에 따라 치료 방법도 여러 가지가 동원되었다.
갑작스러운 엄마의 응급실 방문에 나도 달려 나갔다. 통증이 너무 심해서 제주도에서 올라온 엄마는 응급 입원을 하기 위해 응급실로 갔지만, 그것이 실수였다. 그날따라 응급실에 환자가 너무 많았다. 거기에다가 엄마는 검사를 바로 진행하기 위해 하루 종일 공복 상태로 병원에 온 것이다. 당뇨가 있는 엄마는 쇼크가 올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한여름이었지만 엄마는 부들거리며 떨고 있었고, 응급실 의자에 빼곡하게 차있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하지만 응급실에서는 계속 기다리라고만 한다. 엄마의 상태가 갑자기 나빠진다. 당뇨 쇼크가 온 것이 분명하다. 나는 급한 맘에 응급실에서 큰 소리를 냈다.
“여기 혈당 쇼크 왔어요! 어떻게 계속 기다려요! 쓰러진다고요!”
고래고래 큰 소리를 내자. 그제야 간호사 한 명이 달려오더니 엄마의 혈당을 재고 긴급조치를 한다. 혈당을 안정시키고 진통제를 맞았지만 오늘따라 환자가 너무 많아 당장 입원이 안된다는 거였다. 그럼 어찌해야 하나? 지금 수액을 뺄 수도 없고 시간에 맞춰 진통제가 들어가야 한다. 병원에서 급하게 하룻밤 지낼 수 있는 응급실이 운영되는 주변 병원을 추천해 준다. 내일이면 병동에 침상이 나오니 그곳에서 하룻밤만 보내고 내일 다시 오라는 것이었다.
응급차 호송으로 00 병원으로 향한다. 모든 진료 차트를 같이 보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00 병원은 내가 예전에 발목을 접질렸을 때 갔던 병원이다. 생사가 걸린 환자가 전혀 없는 병원이란 소리다. 응급실로 엄마의 휠체어를 끌고 들어간다. 의사가 차트를 보더니 엄마의 피를 뽑자고 한다. 뭐라고? 엄마는 바늘을 또 찔러야 한다는 소리에 움찔하며 나를 애처로운 눈빛으로 쳐다보더니 고개를 가로로 흔든다. 저 바늘은 막아야 한다! 그 생각으로 의사에게 항의를 표했다.
나 : 이봐요! 선생님! 거기 차트에 다 있잖아요. 방금 전에 S병원 응급실에서 피 뽑아서,
검사 다하고 온 거라고요. 그런데 피를 왜 또 뽑아요?”
응급실 멍청이 : 응급실에 오면 우선 피를 뽑고 검사를 해야 합니다. 절차가 그래요. 그래야 입원을 하지요.
나 : 아니 그건 아는데, 지금은 특수한 상황이잖아요. S 병원에서 침상이 안 나와서, 어쩔 수없이 여기로 추천받아 온 건데, 안 그래도 아픈 사람을 절차 때문에 또 괴롭힌단 말입니까?
응급실 멍청이 : 아니! 그냥 아무나 입원시키면… 여기가 무슨 여관입니까?
그냥 오늘만 ‘여관’ 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어차피 나이롱 병원이면서..., 이 멍청이가 자존심이 세다. 난 계속 안된다고 우겼다. 엄마의 손과 발은 이미 혈관들이 다 숨어 버려서, 한번 찌를 때마다 엄마는 너무 고통스러워했다. 그렇게 말씨름에 내가 이길 찰나, 엄마가 그냥 팔을 내민다. 그만하라고 괜찮다고…, 결국 뽑는 듯 마는 듯 피를 뽑아 내고야 만다. 피골이 상접한 엄마 손등에서는 피가 조금밖에 나오지 않아 아무런 검사도 할 수 없다. 애초에 검사도 안 할 것들이었다. 악마 같은 것들, 미친놈들…. 욕이 절로 나온다. 입원실에 바로 올라가 침상에 엄마를 눕혔다. 6인실 밖에 방이 없었다. 간호사가 필요한 처치들을 다 하고 사라졌다. 치킨을 사 들고 병문안 온 나이롱환자의 친구들은 처음엔 눈치를 보더니 이내 떠들기 시작한다. 그들을 내쫓았다. 오늘은 여기서 그러지 말라고, 오늘 여기 진짜 아픈 사람 있다고….
다음날 아침 엄마는 S 병원 부인과 암 병동에 입원을 했다. 그 입원이 엄마의 마지막 입원이었고, 다시는 퇴원할 수 없었다. 엄마의 상태는 시간이 지나도 전혀 좋아지지 않았다. 엄마의 확고한 믿음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엄마의 몸속 큰 혈관 하나가 암덩어리에 눌려 터졌다. 자궁이 있던 자리다. 질에 한가득 지혈용 붕대를 넣어 틀어막고, 담당 의사는 출혈 위치를 찾아 일단 막겠지만, 만일 지혈이 안 될 경우엔 수혈에 한계가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마음의 준비라니….
난 급히 언니를 호출하고, 엄마의 CT 스캔을 지켰다. 엄마는 잔뜩 불안해한다. 촬영이 끝나고 암 병동 관찰실로 돌아왔다. 관찰실은 병동 안에서 위급한 환자들이 머무는 곳으로, 간호사들이 수시로 체크할 수 있도록 간호사실 바로 옆에 붙어있는 일종의 병동 안의 응급실이었다.
촬영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어째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니 어쩌니 해놓고, 어찌 이것들은 환자를 방치하는가? 분노가 치솟는다. 병원에선 화를 안 내는 게 좋다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들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간호사실로 들어간다. 간호사실이 떠나가라 큰소리로 말한다.
“우리 엄마 촬영하고 왔는데, 왜 아무도 체크 안 해요? 수혈 팩도 다시 꽂고 바이탈도 달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왜 환자를 방치하는 거예요?”
간호사들은 그제야 분주하게 움직인다. 다행히 출혈은 멈췄다. 의사가 천만다행이라며, 당분간 조심히 움직여야 한다고 했다. 언니가 병원에 도착했다. 드디어 나는 마음은 안정을 찾는다.
“언니.. 아까 의사가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어. 마음의 준비를 어떻게 하란 말이야!”
언니를 붙잡고 엄마에게 안 들리게 이야기했다.
“쟤는.. 막 뭐라고 한다? 의사든 간호사든…”
엄마가 언니에게 슬쩍 말한다. 나는 엄마의 그 말에 살짝 으쓱하다. 그나마 항의라도 할 수 있는 딸이 옆에 있어 다행이라는 소리로 들렸다. 지금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이런 거 고작 이런 것뿐이다. 미안해 엄마.
그러니까 엄마도 좀 더 있어줘. 내가 막을 수 있는 건 다 막아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