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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진 Oct 30. 2020

실패할 운명의 모험 part 1

2장 : 어둠 속을 마구 나다니다 _ 5화

김기림의 시인의 <바다와 나비>의 첫 구절엔 이런 글귀가 있다.

“아무도 그에게 심연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나비는 평생 물에 대해 아예 알 수가 없다. 물이 무엇인지 조차도 모른다. 알려줘도 모를 것이다. 


평생 몰랐던 무기력이란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던 나에게, 친애하는 E 언니가 ‘발리’ 여행에 동참하기를 권했다. 평소 같았으면 좋다고 신나게 계획을 세웠을 테지만, 그 당시 나는 “발리에 나도 꼭 가야 해?” 라며 시큰둥이 었다. E 언니는 발리에서 서핑을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올해가 마지막일 것 같다며 나를 설득했다. 언니는 나보다 앞서 두어 달 전에 회사를 그만 그만두었으며, 혼자서라도 발리에 가려고 했었는데, 때마침 나도 회사를 그만둔 것이…, 같이 가라는 하늘의 계시라고 했다.


E 언니: 가서 신나게 놀고 오자. 너 지금 너무 우울해 보여. 다녀오면 머리 속도 좀 정리되지 않을까?

나 : 발리에서 서핑이라…, 그래 언니 때문에 간다. 하지만 난 서핑 안 할지도 몰라.


2주 동안의 발리 여행 일정을 잡고(그중 1주일은 서핑이다) 번개같이 준비해서 떠난다. 발리에 도착하고 1주일이 지나자 매일 아침 커다란 보드를 끌고 바다에 들어가는 일이 익숙해졌으며, 오후에는 태닝을 하거나 마사지를 받고, 요가를 하면서 신선놀음을 하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었다. 나의 우울한 무기력은 발리의 뜨거운 햇살과 일렁이는 파도에 사라진 것 같았고, 한없이 무거웠던 몸뚱이가 날아 갈듯 가벼워졌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는 적도의 태양이 만드는 그림자 속으로 숨어버렸다. 이곳은 지상 낙원이었다. 나는 E 언니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언니! 나를 발리에 데려와 줘서 정말 고마워! 진심이야!”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마지막 4일을 남기고 관광의 성지 ‘우붓’으로 숙소를 옮겼다. 럭셔리 리조트는 아니었지만 그게 뭐 대수랴! 저 작열하는 태양과 풀장만 있으면 난 지금 어디라도 좋다. 리조트를 한 바퀴 휘적휘적 둘러본다. 대형 풀장이 우리 숙소와 먼 것이 조금 아쉽다. 조금 전에 도착했을 것이 짐작되는 백인 남성 두 명이 맥주병을 손에 들고 우리 옆을 지나간다. 우리처럼 리조트 스캔 중인 듯하다. 당근 빛이 도는 붉은 수염을 가진 한 명이 고갯짓으로 인사를 한다. 나도 눈으로 반갑게 답 인사를 해주었다. 

다음날 아침부터 비키니 차림으로 풀장에 나갔다. 어제 봤던 백인 청년들도 이쪽 풀장에 와있는 것을 보아하니…, 다리 건너 있는 대형 풀장은 물이 별로인가 보다. 하루 종일 칵테일을 마시며 몸이 더우면 물에 들어가고 추우면 햇빛에 몸을 말렸다. 난 엉덩이 태닝을 마무리하느라 손바닥 만한 비키니를 입고, 성인 풀과 유아 풀 사이의 물이 찰랑거리는 경계석 위에 엎드려 있었다. 뭔가가 누워있던 내 다리를 툭 친다. 고개를 들어 다리 쪽을 보니 어제 봤던 그 당근 머리다. 누가 봐도 수영을 하다가 턴 하면서 실수로 다리를 건드린 듯 보였으나, 

“오우! 쏴리~” 

그의 진심 없는 사과는…, 딱 수작이었다. 

“댓츠 오케이” 

나는 쿨하게 말하고 다시 엎드렸다. 


힐끗힐끗.. 나를 훔쳐보는 눈길이 느껴진다. 지 친구는 자리를 뜨는데도 그는 남아있으면서, 내가 풀에 들어갈 때마다 때 맞춰서 같이 들어온다. 서로 왕복 자유형을 반복하다가 어느 지점에서 동시에 멈췄다.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내 코를 빤히 보며, 코 나왔다고 말해준다. 이런 지저스! 나는 후다닥 코를 닦아내고 자연스럽게 어디서 왔냐고 말을 돌린다. 자기소개를 기다렸다는 듯이 늘어놓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M은, 인테리어에 종사하는 사람이고, 친구와 함께 서핑하러 발리에 왔는데, 이곳이 마지막 행선지이고 이틀 후에는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나의 짧은 영어 탓에 긴 대화는 힘들겠다 싶어 떼어내려 했지만, 적극적인 그의 행동은 ‘한국말은 알아듣지 못하지만, 이곳에서 유일하게 친해지고 싶은 애들은 너희들 뿐이야!’ 라며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대화가 오가고, M이 우리의 저녁 일정을 묻는다. 특별한 계획이 없는 우리에게 근처에 있는 ‘원숭이 사원’에 같이 가자고 한다. 참고로 말하면 그곳의 원숭이들은 매우 호전적이라서 사원에 가는 것은 이미 포기하고 있는 터였다. M은 자기와 같이 가면 원숭이가 접근 안 한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유쾌한 기분에 E 언니와 함께 좋다고 했다. 그럼 이따 5시에 로비에서 만나자 하고 헤어졌다. 


샤워를 하고 외출 준비를 하는데, E 언니가 아무래도 너만 오라고 한 거 같다며, 자신은 안 가겠다고 한다. 

“무슨 소리야! 같이 가야지.” 

아뿔싸! 언니 말이 맞았다. M은 나만 오는 줄 알았다며 당황해한다. 무슨 속셈이지? 셋이 원숭이 사원으로 향한다. 역시 그곳의 원숭이는 무서웠다. E 언니가 어색함을 무마시키려 우리의 사진을 찍어 준다고 한다. 내 몸에 자기 몸을 밀착시키고 팔로 내 어깨를 감싸는 M은…, 필사적이었다. 아! 이거였군. 그는 여행지에서의 로맨스를 기대하는 거였다. 그리고 그것이 싫지만은 않은 나를 알아챈 것이다. 저녁을 대충 먹고 나랑 더 놀자고 한다. E 언니는 눈치 빠르게 알아서 빠져준다. 

그렇게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국인이 아닌 빨강머리 외국인과 로맨틱한 하룻밤을 보냈다. 그다음 날도..., 그렇게 이틀이 지나고 각자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날이 되었다.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우리 둘은 한참 동안 그렇게 연락처를 주고받고, 뽀뽀를 해대며 찰싹 달라붙은 찹쌀떡을 겨우 떼어 놓듯이 떨어졌다. 


로비에 있던 리조트 사장 아저씨가 우리를 애처로운 듯이 바라보다가 한마디 한다.

“왜 그와 같이 안 가니?”

“하하! 무슨 소리예요? 이틀 전에 여기서 만난 사람인데요?” 

나는 공항으로 떠나가는 그 차에 손 키스를 날리며 아저씨에게 말해주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붕붕 떠있다. 여행지에서의 뜨거운 로맨스는 그리 빨리 사그라들지 않는다. 

끝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은 아직 보고 싶지 않다. 

행복한 장면만 구간 반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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