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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진 Oct 30. 2020

실패할 운명의 모험 part 2

2장 : 어둠 속을 마구 나다니다_ 6화

첫눈에 반한 것도 아니다. 말도 잘 안 통하는데 그가 편할 리도 없다. 그리고 여행지에서의 만남은 원래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무모하게도 어리석은 모험 정신이 생겼다. 이 모험은 신대륙을 발견하는 것만큼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나 : 언니. 왜 그런 거 있잖아. 잘 될 리가 없는데 한번 도전해 보고 싶은 거…, 혹시 잘 될지도 모르잖아? 우린 연락을 계속하고 있단 말이지. M은 내게 노래도 불러주고 있어. 너무 로맨틱한 남자야. 내가 유학을 생각하고 있다니까 샌프란시스코로 오라며, 연수기간 동안 자기가 보살펴 주겠다는 거야. 어떻게 생각해? 안 그래도 유학은 샌프란시스코나 로스앤젤레스를 고려하고 있었거든….

또 다른 친애하는 Y 언니는 굉장히 이성적이며, 단 칼 말하기를 잘하는 사람이다.  

Y : 네가 유학을 생각한다면 한번 도전해봐! 가서 학교도 살펴보고, M의 실체를 보는 것도 좋지. 그러면 너의 마음도 달라질 거야. 너무 실망하진 말고 그리고 그것을 실패라고 생각지는 마. 교훈으로 생각하면 나쁘지 않지. 몸조심하고.

출발하기도 전부터 실패를 말하다니, 너무 이성적이다! 이 언니. 

한 귀로 흘려버린다. 그래서 귀가 두 개 있는 거라며….


낯선 곳에서의 삶. 유학을 준비하기에 샌프란시스코는 적당한 장소인 것은 맞다. 일단 한번 가보자! 미국에서 2주일 이상 머물러 본 적이 없다. 특히 동부는, 한 달 일정의 <나 혼자 미국 살기>는 나에겐 대 모험의 시작이었다. 10시간의 비행 끝에 드디어 도착했다. 샌프란시스코!

미국에서는 입국심사 중 여행 목적에 관해 질문을 받았을 때 무조건 ‘관광’이어야만 한다. 하지만 들뜬 기분에 그만 ‘친구를 만나러 왔어’가 빌미가 되어 조사실로 끌려갔다. 한 시간여를 기다리다가 드디어 내 차례다. 꼬치꼬치 캐묻는 이 동양인 세관원은 참으로 집요하다. 친구 M의 이름, 나이, 직업, 주소,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 한 달 후에 돌아갈 것이 확실한지, 그와 결혼할 것인지, 왜 결혼 안 할 그를 만나러 왔는지…, 난 모든 질문에 솔직히 답한다. 한 달 전, 발리에서 알게 된 친구 M을 만나러 이곳에 왔으며, 내 돈으로 비행기표 사서 왔고, M과 결혼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며, 한 달 후에 돌아갈 것이 확실하다.

“그러니 뭐가 문제란 거죠?”

“문제 될 건 없지.” 

그 한마디로 어이없이 허가가 난다. 다음에 올 때에는 남자 친구에게 ‘결혼 허가서’를 첨부하라고 언질을 준다. 여전히 나를 위장 결혼하려고 온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다. 여권에 도장이 찍히고 드디어 공항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나를 미친 사람 보듯 쳐다보던 세관원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이곳은 너무 춥다. 6월 중순이 무색하게…, ‘캘리포니아’라며! 공항 밖으로 나오자마자 트렁크에서 아무 옷이나 집히는 대로 꺼내서 뒤집어쓰고 담배를 한 개비 물었다. M은 공항 주변을 한 시간 넘게 빙빙 돌며 기다리다가 드디어 나를 픽업했다. 나를 만나자마자 와락 끌어안는다. 곱실거리는 붉은 머리와 수염의 이 백인 청년은 발리에서 만났던 그 청년이 분명 맞다. 하지만 그의 포옹은 발리에서의 포옹과 온도가 달라져 있다. 이빨이 맞부딪히는 이곳의 추위가 나의 감정의 온도까지 바뀌게 한 것일까? 상큼 발랄하려던 나의 계획은 담배 냄새와 피로와 고문에 찌들어 수포로 돌아갔다. 그리고 내가 겪은 상황을 M에게 영어로 설명하기도 너무 힘들다. 대략 설명을 들은 M은 “내가 그래서 경찰을 싫어해” 라며, F 워드를 남발한다. 


어느새 금문교를 지나가고 있었다. 어? 집이 샌프란시스코가 아니었어?

‘언제까지 네가 원하는 대로 지내도 괜찮아’라던, M의 집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참 북쪽으로 위치한 ‘샌 라파엘’ 외곽 지역이었다. 차가 없으면 어디에도 갈 수 없는 외딴 지역에 있는 빌라 단지였다. 난 당연하게도, 그가 사는 곳이 도보로 어디든 돌아다닐 수 있는 위치 일거라 혼자 착각하고 있었던 거다. 내 짐을 픽업트럭에서 끌어내리며 우스갯소리를 한다.

“너 진짜 이민 왔어? 짐이 왜 이렇게 많아?” 


지은 지 오래돼 보이는(성의 없이 지은) 2층짜리 빌라의 1층이 M의 집이었다. 20평 남짓한 크기의 빌라는 작은 거실과 2개의 방, 오픈형 주방, 거실만 한 크기의 뒤 뜰이 있다. 가벼운 미닫이문 하나가 거실과 뒤뜰의 경계를 표시하는 정도였다. 뒤 뜰은 M과 그의 룸메이트가 키우는 커다란 두 마리 개의 화장실 겸, M의 목공 장비가 가득 차려져 있는 작업 공간으로 쓰이는 흙 마당이었다. 그곳에선 바람이 불 때마다 흙먼지를 집안으로 실어 나르고 있었지만, 개들 때문에 문을 닫아 놓을 수가 없다고 했다. 짙은 회색 천의 소파는, 침대보다 그곳에서 뒹구는 시간이 더 많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찌들어 반들거렸다. 쓰레기가 산처럼 쌓여있는 쓰레기통, 커다란 개가 날뛸 때마다 흙먼지와 털이 날리는 거실의 카펫은 절로 까치발을 들게 만드는 상태였다. 거미는 덤이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사이즈의 날벌레도 집안에 있었다. 그렇다. 그곳은 내가 상상하던 샌프란시스코가 아니었다. 실망한 내 표정이 은연중에 드러났으리라. 거기에다 창고 같은 나머지 방에는 룸메이트가 살고 있었다. 발리에서 봤던 그의 친구다. 둘은 그렇게 함께 샌프란시스코 외곽에서 비싼 월세를 내며, 언젠가는 시내에 아파트를 장만하는 게 꿈인 캘리포니아의 29살 젊은이들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내가 도착하기 전에 침대 시트와 내가 쓸 수건은 빨아 두었다며, 칭찬을 바란다. 세탁기가 집에 없는 그들은 빨래를 연중행사처럼 했던 것이다.

‘맙소사…, 내가 진짜 잘 모르는 사람 집에 왔구나…, 겁도 없이’

로맨스는 아주 멀리 사라져 버렸다. 오자마자 단 몇 시간 만에. 이제 이곳을 어떻게 탈출해야 할지 그것이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었다.


M의 방은 거실보다 더 쑥대밭이었다. 엉망으로 흩어져 여기저기 쌓여있는 옷가지들, 서핑 보드로 꽉 찬 벽, 알 수 없는 용도의 거대한 서랍장(옷은 밖에 다 나와 있으니...), 내 허리 높이까지 오는 커다란 침대. 그리고 침대 위 그의 개. (나를 좋아하는 듯 기회만 되면 얼굴을 핥아댔다.) 너무 피곤하다. 탈출은 둘째치고 일단 샤워를 하고 잠을 자야겠다. 옷을 벗고 샤워를 하려 하는데, M이 욕실로 들어온다. 여기저기 거미줄 장식이 있는 좁아터진 욕실은, 욕정을 일으키기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는 이 순간을 위해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분위기를 이끈다. 좀처럼 불붙지 않는 나는 그가 콘돔이 없다는 핑계로 멈췄다. 멀쩡한 정신머리의 남자라면 알아챘을 것이다. 내가 피하는 것을…. 

M과 그의 개와 침대에서 뒤엉켜 잠을 잤다. 나의 수면제가 없었다면, 나는 한순간도 잠들지 못했을 것이다. 아침나절 대충 치른 섹스로 개 털과 개 침과 M의 정액과 나의 피곤이 온몸에 엉겨 붙어버렸다. 시차 적응은 나이가 들면서 더 어려워지는 일 중 하나다. 피곤을 씻어내고 이제 탈출 계획을 세워야 할거 같다. 샤워를 하며 탈출의 핑곗거리를 고민한다. 이런... 생각이 안 난다. 큰일이다. 샤워를 끝내고 나오는 찰나, 문 밖에서 M의 통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긴 거 같다. 새로 빨았다는 커다란 수건만 겨우 두르고 있는 나에게 달려들어 와락 울음을 터트린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어린아이 같은 울음. 불길하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적중한다. 그 전화는…, M의 가장 친한 친구의 5살 난 아들이 오늘 풀장에 빠져 익사했다는 비참한 소식을 알리는 전화였다. 하필이면, 왜 오늘이냐! 번개 맞아서 죽거나, 비행기 추락으로 죽거나 하는 일 따위보다 더 낮은 확률의 일이 나에게는 생긴다. 마치 내가 불행을 몰고 온 것 같아 잠시 숙연해졌다. “아이 엠 쏘리” 그 말만 반복했다.


M은 풀장에서 익사한 그 아이의 대부(god father)라서, 바로 친구의 집이 있는 타호(Taho)로 가야 한다고 했다. 타호까지는 이곳에서 5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이며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빨리 나의 거처를 호텔로 옮겨서, 나를 잊고 온전히 슬픔에 빠질 수 있도록 해주는 것뿐이었다. 사실, 탈출 계획은 안 세워도 되니 나로서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M은 나를 샌프란시스코 시내의 부티크 호텔로 옮겨주었고, 며칠 후에 정리되면 바로 돌아오마 하고 길을 떠났다.


누가 알 수 있었을까? M과 내가 잠시 섹스를 하던 그 짧은 순간에 그의 대손이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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