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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진 Oct 31. 2020

라벤더색 복순 씨!

3장 : 깊은 바다의 물고기는 물이 뭔지 모른다_ 3화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언제나 엄청난 자린고비였다. 단 한 번도 시원하게 펑펑 돈을 써 본일이 없다그런 엄마가 유일하게 막 지르는 것은 오직 자식들의 교육비뿐이었다. 그런 이유로 엄마는 나의 낭비벽을 항상 나무랐다결혼도 안 한 처녀가 저축 통장 하나 없이 월급을 매달 몽땅 다 써대는 것을 언제나 못마땅해했다. 월급은 원래 잠시 통장에 묻었다가 가는 것이라고 큰소리치는 나에게빚은 안 지고 살고 있는지 내 얼굴을 볼 때마다 확인을 받았다

그렇게 막 쓰고 살다가 나이 들면 골드 미스’는 언감생심돈 없으면 넌 그냥 노처녀야!.”

 

그렇게 항상 절약을 외치던 엄마가 난소암 선고를 받고 항암치료의 고행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어느 날 명품 가방을 갖고 싶다고 했다갑자기 명품 가방이라…. 불안이 고개를 쳐드는 깊은 생각은 하기 싫었다. 가방 하나 따위 뭐가 대수냐백화점 1층에 자리 잡고 있는 C, L, B사를 차례로 돌면서 가방을 골랐다엄마는 L사의 가장 최신 상품을 골랐고나는 우아하게 3개월 카드 할부를 질렀다발랄하기 그지없는 그 가방은 엄마의 마음까지 밝게 만드는 것 같았다그 이후부터 서울에 항암 치료를 받으러 오는 때마다 엄마는 무언가를 사기 시작했다한 번도 물건에 돈을 낭비해 본 적 없는 엄마가 드디어 무의미한 소비생활이 주는 소소한 기쁨을 이해한 듯하다항암치료로 빠져버린 머리카락처럼 누구에게도 보상받을 수 없는 공허를 잠깐이라도 물건으로 대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두어 달 후엄마와 함께 또 백화점에 갔다여성의류매장을 여기저기 둘러보더니 한 매장으로 들어간다난 엄마의 취향은 도저히 모르겠다

이거 어때저건 어때?” 

.. 별로야이상해.”

나의 심드렁한 표정에 매장을 지키던 직원이 쪼르르 달려온다

따님이 엄마 취향을 잘 모르시네….”

직원은 엄마의 비위를 맞추기 시작한다항암 치료 때문에 창백한 엄마에게…,

사모님 얼굴색이 밝아서 이 컬러가 잘 어울려요사모님이 디자인은 어떠세요이번에 최신 유행 디자인인데한번 입어보세요.”

엄마는 이 옷저 옷추천받은 옷들을 몽땅 다 입어본다엄마는 옷을 입고 나올 때마다 거울에 모습을 비춰보며 매장 직원에게 어떤지 물어본다옷 입어보느라 서로 지칠 만도 하건만세일즈 정신이 투철한 여직원은 엄마에게 하나라도 팔겠다며, ‘조금만 있으면 넘어온다라는 신념으로 최후의 발악을 하는 게 보였다진심 없는 칭찬들을 남발한다뭐가 그렇게 잘 어울린다는 건지….

글쎄정말 그게 맘에 들어…?”

아니 맘에 안 들어가자잘 봤어요.”

.. 엄마입어본 옷을 산처럼 쌓아두고홱 돌아서 나오는 우리의 뒷모습을 망연자실 쳐다보던 잔뜩 약이 오른 그 매장 직원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호들갑스러운 싸구려 말투로 질 떨어지는 옷을 엄마에게 팔아보려 알랑거리다가 된통 당한 것이다

내가 저런 옷을 살 줄 알고내 귀가 얇아 보이니?” 

엄마는 얄궂은 미소를 짓는다엄마는 백화점에서 매장 직원에게 손님 대접도 받고아부도 듣고좋은 것을 입어보고기분 좋게 돈도 쓰고한 번도 제대로 누려보지 못한 그런 살아있음을 느끼러 백화점에 간 것이다그런 엄마에게 진심 없는 말만 내뱉는 매장 직원은 괘씸했던 것이다나는 엄마의 가방 수발을 하며엄마가 부리는 그 낯선 통쾌함에 놀랐다엄마도 저렇게 살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지금까지 몰랐네

 

맞다처녀 시절 복순씨라 불렸던 엄마는 엄청난 멋쟁이였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내가 대학생이 되고 맞이하는 첫 방학 무렵이었다엄마는 서랍장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던 라벤더색 미니 원피스를 하나 꺼내 들었다본인이 젊은 시절에 얼마나 날씬하고 유행에 민감한 멋쟁이 아가씨였는지를 나에게 알려주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수진아이거 봐이거 엄마가 네 나이 때 입었던 거야어때 아직도 예쁘지?”

에이 거짓말엄마가 이걸 입었다고허리가 이렇게 작은데?”

질 좋은 옷감으로 잘 재단된 민소매 원피스는 웬만한 자신감이 아니고서야 입을 수 없는 디자인이었다그 원피스를 만든 양품점은 아빠의 누나즉 고모가 근무하는 양품점이었고고모는 엄마를 매우 마음에 들어했더랬다. 그래서 아빠와의 맞선을 주선했고달랑 세 번 만나고 아빠와 결혼한 21살의 복순 씨는 우리들의 엄마가 되면서그 라벤더색 민소매 원피스를 다시는 입지 못했다.  

 

모든 엄마들은 엄마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누군가의 아내이며누군가의 엄마가 되어 주기 전에엄마는 여자였다. 사치를 부릴 줄 몰라 안 부린 것도 아니요멋을 낼 줄을 몰라 매일 같은 옷을 입는 것이 아니었다그저 자식 걱정남편 걱정에 죽을 때까지 자신은 마음대로 쓰지도 못할 돈을 그렇게 모으기만 하셨던 거다엄마들은 그렇게 산다그리고 죽는다

 

대부분의 딸들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한다딸들이 지켜본 엄마의 삶은 희생의 대명사로 보이는 까닭일 것이다그러나 엄마는 어떤 생각이었을까나는 그걸 물어보지 못했다

내 엄마여서우리들의 엄마여서엄마는 어땠어그래도 조금은 행복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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