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 깊은 바다의 물고기는 물이 뭔지 모른다 _ 5화
나의 귓가에 수컷의 흥분한 숨소리가 들렸다. 생전 처음 듣는 그 소리는 살아있는 것이 내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소름이 온몸에 돋친다.
94학번 새내기의 한남동 하숙집 생활이 시작된 지 3개월가량이 지났다. 처음부터 혼자 사는 것이 끼니도 제때 못 챙기고, 외로울 것이라 생각한 엄마는 ‘순천향대학병원’ 바로 앞에 위치한 기독교 신자 분이 운영하는 하숙집에 나를 집어넣었다. 남는 방도 따로 없어서 고등학생 ‘소영’이와 함께 문간방을 써야 했다. 소영이는 부모님이 모두 귀농을 하는 바람에 서울에 홀로 남겨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하숙집에 위탁된 소영이는 주인아주머니와 친분이 있는 집 아이였다. 오래된 2층짜리 단독주택은 이른 나이에 홀로 된 주인아주머니가 혼자 살기 적적하여, 도우미 할머니 한 분과 같이 살면서 운영하는 하숙집이라 여느 일반 가정집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일층은 여학생들이, 이층은 남학생들이 묵었으며 대부분은 순천향대학병원에 다니는 의과대 학생들이었다. 그것이 더욱 엄마는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대학교 1학년 고삐 풀린 망아지는 마구 날뛰고 싶지만, 하숙집 할머니들이 놀랠까 봐 저절로 행동을 자재하게 됐다. 하숙집의 실세는 일층에 머무는 의대 여학생이었다. 그녀의 엄마는 모든 자식들을 의사로 키워낸 위대한 신사임당이었고, 자신의 막내딸도 의학을 전공하고 있으니 물심양면 하숙집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하숙집의 모든 일정은 그녀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식사 시간이나 취침시간이나, 가장 난처했던 것은 하나뿐인 화장실 문제였다. 소영이의 말로는 그 의대 언니가 문을 두드리면 바로 나와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안 그러면 지랄을 한다나? 에이 설마 그러겠어? 얼마 지나지 않아 설마 했던 그 일이 생기고야 말았다. 화장실에서 큰일을 보던 나는 그 의대생의 문 두들김에 바로 나오지 못했다. 어찌 생리현상을 내 맘대로 조절할 수 있단 말인가? 곧 그녀의 지랄이 무언지 봤다. 아니 들었다. 닫힌 그녀의 방안에서는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고 그 물건이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한참을 들렸던 것이다. 걱정스러운 표정의 소영이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고….’
그리고 다음날부터 나에게 소심한 복수를 하는 ‘광년이‘가 탄생했다. 내 신발을 문 밖에 던져 놓거나, 문이 부서져라 꽝꽝 닫거나, 내 방 문 앞을 지날 때마다 괴상한 소리를 낸다거나 등의 천하에 못난이 같은 짓을 해댔다. 어이없고 기가 차서…. 그러던 어느 날,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있을 때였다. 공용 유선 전화기는 신발을 갈아 신는 출입구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었다. 나는 입구 한편에 서서 수화기를 귀와 어깨에 끼우고 우편물을 확인하면서 친구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무언가 나를 쳤다. 그 광년이가 출입문으로 나가면서 서있는 나를 이유 없이 밀쳤던 것이다. 나는 아래로 떨어질 뻔하다가 간신히 규형을 잡고 똑바로 서서 그 광년이를 쳐다봤다.
“뭐야! 미쳤어?”
“너는!!... 넌!... 하느님을 안 믿어서 그런 거야!”
“뭐라고? 무슨 헛소리야! 너는 하느님을 믿어서 그 모양이냐?”
무언가 욕을 하고 싶었겠지만, 본인은 ‘신을 믿는 자’인지라 차마 욕은 못하겠고 나를 악마로 취급하는 신자스러운 멘트를 남기고는 신발을 제대로 신지도 못한 채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뭐야 저거 완전 돌아이 아니야?!"
1층에서 더는 저 미친 애와 같이 못 지내겠다는 나의 항의에 계약기간이 남은 주인아주머니는 고심 끝에 2층에 방이 하나 비어 있다며 그 방에서 지내도 되겠느냐 물었다. 나는 당연히 저 미친 애를 마주치지만 않는다면 어디라도 좋다고 했다. 2층은 1층과 달리 남학생들만 있는 곳이라 지저분했다. 하지만 함께 지내기에는 더없이 성격 좋은 의대 오빠들이었다. 1층의 저 광년이가 만일 미래에 의사가 된다면, 그녀에게 목숨을 맡기는 환자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환자가 신자가 아니라서 죽었다고 말하고도 남을 것이니까.
초자연적 현상은 아무런 기척이나 예고 없이 불쑥 들이대는 것이, 그래서 공포스러운 이유일 것이다. 2층에 마련된 새로운 나의 방은 길쭉한 형태였다. 그래서 침대는 방 끝 벽에 붙여 놓았고, 조그마한 텔레비전은 침대 앞에 비스듬히 놓여 있어, 벽을 등지고 옆으로 팔베개를 하면 시청 자세로 그만이었다. 그날도 그 자세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대낮이었으니 주말이었으리라 짐작한다. 처음엔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소리인 줄 알았다. 텔레비전 소리를 줄여도 변함없이 그 소리가 계속 들리자, 나는 텔레비전을 껐다. 내 등 뒤에 누군가 있다. 나의 귀에 대고 이상한 소리를 낸다.
‘하악~ 하악~ 하악~.’
단지 소리뿐만이 아니다. 그 축축한 습기마저 느껴졌던 것이다. 자위를 하는 성인 남자의 흥분한 소리와 같다. 텔레비전 모니터에 반사된 나의 누워 있는 모습은 그 침대 위엔 나만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었다. 차마 뒤돌아 볼 수가 없다. 등 뒤를 돌아보면 나는 보면 안 되는 것을 볼 것만 같은 공포에 휩싸였다.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 소리는 멈추지 않았고 점점 커질 뿐이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움직이기로 했다. 이 방을 빨리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발부터 조금씩 침대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부드러운 천이 굴곡을 흘러내리 듯 몸을 흘러내려와 바닥에 네발 자세가 되었다. 뒤도 안 돌아보고 냅다 기어 나왔다. 맨 손으로 그 집을 달려 나와 친구의 집으로 도망쳤다. 그 하숙집은 그날부로 계약이 종료됐다.
1층 두 어르신에게 전날 내가 겪은 일에 대해 낱낱이 말해주었고, 난 그 방에 다시는 들어가지 않겠노라 단호하게 말했다. 주인아주머니는 아무런 토도 달지 않고 남은 기간 금액을 그냥 환불해주었다. 평소 ‘스크루지’ 뺨을 칠만큼 구두쇠인 아주머니 치고는 참 이상한 행동이었다. 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도우미 할머니가 무언가를 이야기하려 하자. 주인아주머니가 주책스러운 소리 하지 말라고 입을 막아버렸다. ‘그 방에 무언가가 있었구나!’ 이 악마 같은 사람들…, 나를 귀신 나오는 방에 가두려 했다니!!
공포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신자를 가장하고 악마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운영하는 ‘공포의 하숙집’이라는 나의 믿음은 한동안 이어졌다. 소영이를 그 소굴에 놔두고 나오는 것이 가장 마음에 걸리는 일이었으나, 어쩌겠는가? 슬픈 눈으로 나에게 작별을 고하는 소영이었다. 그 하숙집을 떠난 후에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나에게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벽에다 침대를 붙이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나는 평생 종교와는 인연을 맺어 본 적이 없다. 종교는 온전히 자신을 믿지 못하는 유약한 자들이나 믿는 일종의 ‘자기 최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일 그날 그것이 진짜 귀신이 내는 소리였다면, 사후 세계가 있다는 증거이고, 사후 세계가 있다는 것은 신이 있다는 증거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의 끝엔 ‘존재하지도 않는 것에 증거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로 항상 흐지부지한 결말이었다.
“말 좀 해보시오. 친구. 무시무시하거나 비밀스럽거나 환상적인 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어째서 실제 인생으로부터가 아니라 꼭 유령이나 저승 세계에서 소재를 취하는 것일까?”
“이해할 수 없으니까 무서운 거지’
“아니 그렇다면 인생은 이해가 되시오? 말해봐요, 그래 당신은 저승 세계보다 인생을 더 잘 이해한다고 생각합니까?”
-체호프 <공포> 중
체호프의 글처럼 어떠한 논리나 과학으로도 설명할 수 없었던 그 심령 체험보다, 사는 것이 훨씬 더 무섭다는 것을 어느새 체득해 버린 나이다. 이해할 수 없는 그 미스터리는 저승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승에도, 지금 나에게도, 우리가 살아가는 한 언제나 존재할 것이다.
엄마는 돌아가시기 두 해전 천주교 신자로 개종을 하고 세례를 받았다. ‘데레사’가 엄마의 천주교 이름이다. 천국에서 평온히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을 엄마가 눈에 그려진다. 그 무엇도 믿지 않는 내가 막연히 사후 세계에 대해 이런 그림을 그리는 것은, 죽음은 적어도 살아내는 것보다는 고통이 덜 해야 마땅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사들의 가운데에 엄마가 있다는 것이 내 마음에 평온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기적인 ‘믿음’은 공포스러운 이 삶을 살아내려면 반듯이 필요한 것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