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6000, 4천년 만에 다시 만난 아사한과 마한,

한민족의 시작

by 한임

한웅이 몽고의 소금을 확보하던 중 몽고사막 남쪽에도 사람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결과적으로 아느 멸망 이전 동쪽으로 떠났던 마그의 후손들을 약 4천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무척이나 반가웠다. 또한 식량을 확보할 수 있다는게 너무 좋았다.



만남의 기쁨도 잠시 바이칼에 남아있는 한인들에게 가져다 줄 식량을 확보한 한웅은 서둘러 돌아가야 했다. 명상에 들어가면 몇날 며칠이고 먹지 않고서도 지내는 한인과 사흐들이라 해도 몇 달, 반 년 씩이나 굶을 순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지하라 해도 추위는 스며들 수밖에 없다. 한웅이 고집불통 순혈들을 버린 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무엇보다 혼혈을 선택한 한웅은 그 스스로 제천행사를 진행할 수 없었기에 바이칼에 있는 사흐와 마그들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한웅은 많은 경우 군사작전을 펼쳤다. 한웅 당시에는 문화적 창조가 거의 없었다. 계속해서 시키를 찾아 싸우고 함께한 순혈의 주관 하에 하늘에다 고하고의 반복이었다. 순혈은 한웅과 같이 다니긴 했으나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이동 중엔 군사가 먼저 움직여 공격을 했고, 자리를 잡은 후엔 순혈들이 돌아다니며 여기저기에서 제사를 지냈다. 과거의 것을 찾아다녔던 시기이다.



당시 마한은 한반도 뿐 만이 아니라 산둥반도, 요동반도 일대에 퍼져있었다. 순수 마한은 한반도에 모여 있었지만 혼혈 마한은 여기저기 퍼져 있었다. 더구나 마한은 마을마을 성곽을 이루어 폐쇄적으로 살고 있었기에 기원후까지도 순혈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마한은 벼농사를 지었다. 또한 염전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발효음식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절임식품을 만난 한웅 사람들 매우 반가웠으리라. 이렇게 무역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중간기착지를 만들었다. 바이칼과 마한의 중간지역, 바로 아사달이었다.



한린, 배달, 한웅.jpg 한린과 한웅 세력범위



현재 우리는 신시와 아사달을 동일한 곳으로 여기고 있다. 아니다. 신시는 바이칼 호수 아래 지하도시이며 아사달은 현재 중국이 발굴하고 있는 요하문명, 홍산문명이 바로 그곳이다. 신시와 아사달은 도시의 규모와 기술에 있어 상당한 차이를 갖는다. 신시는 아느에서 가져온 기술과 연장을 이용 마그와 사흐가 직접 제작한 도시다. 신시, 말 그대로 신이 모이는 곳으로써 현대 기준으로 봐도 말도 안되는 규모와 수준의 도시이다. 무엇보다 만들어진 제단은 웅장하고 신령하기 그지 없었다. 그에 반해 아사달은 간이형 제단이 설치된 곳이다. 그것마저 아사달은 그 근처에서 여러 번 위치를 이동했다. 지금 발굴된 홍산문명 유적이 아사달의 전부라 함부로 짐작해서는 안 된다.




아사달의 위치를 잡는데 홍산이 큰 역할을 했다. 아느의 고원 한 곁을 차지한 붉은산과 유사했기 때문이다. 이에 홍산이 멀찍이 보이는 곳에 아사달을 정하고 이곳을 만주 일대를 돌아다니는 한웅의 각 무리와 마한의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곳으로 했다. 제대로 된 제천행사는 바이칼의 한인과 사흐, 마그들이 지내고 있었으나 정기적으로 아사달에서도 제천행사를 지냈다. 바이칼에 비해 규모가 작은 제단을 설치하기도 했고 신수들의 형상을 딴 돌무더기를 만들기도 했다. 비록 발견된 돌무더기는 천룡 뿐 이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이곳에 정착하여 제단을 지키는 이를 두고선 한웅은 시키들을 처단하는 전쟁을 계속했다. 제천행사는 별의 움직임에 맞춰 이루어졌다. 그러다 보니 여름일 수도 있었고 또 겨울에 제천행사를 할 수도 있었다. 문제는 겨울에는 바이칼에 갈 수가 없었다. 바이칼 호수는 얼어붙어 건널 수 있었지만 너무 추워서 이동 중 사망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겨울 제천행사 장소는 아사달로 정해졌다.



홍산문화 용돌무더기.jpg 요서지방 석소룡, 기원전 6000년




한편 아사달은 한 곳이 아니다. 기원전 6000년에서 기원 때까지 대략 6000년의 세월이 합산된 곳이기 때문이다. 아사달은 BC 6000년 경 세워진 신시와 마한의 중간 지점으로서의 아사달과 BC 3000년 경 신시 멸망 이후 새로운 기착지로서의 아사달, 이후 BC 1300년 경 아사달이 무너진 이후 새로이 세워진 아사달이 모두 함께 있다. 단 이집트의 피라미드처럼 같은 자리에 겹겹이 세워진 것이 아닌 조금은 다른 자리에 지어진 것이란 차이가 있다.




아사달과 바이칼 사이에는 유적이 남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한웅 때 건축은 거목문화였다. 길게 잡으면 8000년, 짧게 잡으면 5000년 지난 일인데 나무건축물 흔적이 남아 있을지 자신할 수 없다. 거목문화였다. 제천의식 하는 곳만 돌을 사용했다. 바이칼 관련해서는 지하도시인 신시를 찾기 전까지는 흔적을 찾기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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