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6000, 아사달의 제천행사, 배달 한웅
한민족의 시작
기원전 6000년 이래로 한웅은 바이칼에서 산둥까지 큰 영역을 영향권으로 두었다. 그리고 시키들을 찾아 소탕했다. 하지만 끝까지 시키들의 본거지는 찾지 못했다. 이동을 해야만 했기에 목축을 했고 무리별 흩어져야 했다. 그래서 조금 높은 고원의 나무 아래서 매년 제천행사를 가졌다. 그 나무가 세계수이며 이곳이 아사달이었다. 랴오닝성의 차오양시(조양시)와 내몽골의 츠펑시 사이에 위치한 아사달은 1980년대 이후 홍산문화라는 이름으로 중국에서 발굴하고 있는 중이다.
제천행사는 하늘님께 대소사를 보고 드리고 그 뜻을 내려 받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나 제천행사를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하늘을 바라보고 무언가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 어떤 변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사달의 제천행사는 응답받는 무엇이 있었고, 그랬기에 그 소문은 점점 더 퍼져나갔다. 그리고 더 많은 세력들이 아사달로 모여들었다.
아느에서 여신인 기와 사흐들은 날씨를 조절할 수 있다. 기는 단순 날씨를 넘어 기후를 조절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 지구 전체의 기상까지도 조절할 수 있다. 우리 인간은 그분들을 신이라 칭하기도 하고, 하늘님이라 칭하기도 한다. 이에 반해 사흐는 좁은 범위의 날씨를 제어할 수 있음은 물론 하늘님과 소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좁다는 범위가 지금의 도 단위에서 한반도 정도이다.
아느에서도 기의 신전은 계단식 피라미드 형태로 12개의 방벽을 지나야만 여신 기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피라미드와 유사한 아사달의 제단 역시 아느에서의 형태를 따랐다. 아느로부터의 유산, 이것이 서로 다른 대륙에서 비슷한 시기 출현한 거대 문명에 관한 대답이다.
피라미드, 출처 : www.touropia.com
계단식 피라미드, 출처 : www.touropia.com
제천행사는 하늘님께 비, 구름, 우박, 서리, 가뭄, 바람, 안개 등의 기상을 지역별로 계절별로 요청을 올리고 그 응답을 받는 행사이다. 그리고 그 기원제는 매우 상세했다. 각각의 방위마다 별도의 제사를 지냈고, 각각의 기후요소별로 별도로 요청을 드렸다. 360도 방위별로, 거리별로, 또 기후요소별로 단 1시진의 시간을 허락했다. 제사는 단군과 린에 의해 진행되었고, 이는 쉴 새 없이 며칠 동안 이어졌다.
하늘님께 요청드리는 것은 다양했으나 결국 기상에 관한 것이었다. 지금도 인간 삶에 날씨가 미치는 영향이 상당하지만 당시는 더욱 심했다. 또한 기상 요소를 강우량이라 한정 짓는다면, 어짜피 내려야 할 강우량은 정해져 있다. 이에 내 땅에 올 비를 줄인다면 결국 다른 지역에는 폭우가 쏟아질 수 밖에 없었다. 정기적인 제천행사는 10년에 한번 꼴로 지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앞으로 10년간의 날씨에 대해 요청을 드리고 그 응답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한번 형성된 기후 패턴을 웬만해서는 잘 바뀌지 않는다. 이에 그 지역을 대표하는 자로서 제천행사에 참가하는 것은 어떤 일보다 중요한 행사였다.
결국 제천행사는 지금의 월드컵과 같은 국제행사가 되었다. 당시 대륙 간 교류는 불가능했기에 지역적으로는 아시안게임이지만 그 위상은 지금의 월드컵이나 올림픽보다 더 성대했다. 아시아에 있는 많은 세력의 장들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날씨를 알고 또 기상이변을 밀어내야 했다. 결국 이들은 상당한 제물을 가지고 와야 했다. 가지고 온 제물의 절반은 주신국인 배달 한웅에게 제출해야 했고, 나머지 절반은 팔아서 경비를 충당해야 했다. 자연스레 아사달에 시장이 형성되었다. 이는 지금 5년마다 열리는 등록 엑스포와 유사하다.
제천행사 이후, 모두는 각자의 위치로 흩어졌다. 하지만 배달의 일부, 천손족은 아사달에서 제단을 지켰다. 이렇게 아사달은 신시로서 3700여년의 역사를 누렸다. 배달은 기원전 6000년에서 고조선이 성립되기 전 기원전 2333년대까지 유지되었다. 하지만 아사달은 고조선이 성립된 이후, 기원전 1300년 까지 고조선의 서울과 같이 활용되었다.
신시, 시는 모으다는 뜻으로 신시는 신이 모이는 곳
도시, 무리 도에 모이다 시, 무리가 모이는 곳
당연히 아사달에는 많은 신수들도 나타났다. 사해유적의 용 돌무더기는 이를 표현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 인식한다. 지금의 중국인들이 용을 좋아하니 용 돌무더기만 알아차리고 나머지 신수 돌무더기는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요하문명은 아사달에서 바이칼 쪽으로 쭈욱 연결된다.
하지만 배달문명의 중심은 아사달이 아닌 바이칼이다. 바이칼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중계지로서 아사달이 선택된 것이다. 바이칼에도 구조체가 만들어져 있는데 모양 자체가 옥으로 조각되어 있다. 하지만 계절이나 등등의 이유로 바이칼에 다가가지 못하는 경우, 멀리 떨어진 이쪽에서도 의식을 취하고자 임시로 만들다 보니 돌무더기가 된 것 뿐이다.
배달 시대, 아사달은 바이칼이 너무 멀기에 임시로 만든 중계지, 바이칼과 마한의 중간지였다.
비슷한 의미로 괴베클리 테페도 있다. 여기도 중계지이다. 중계지란 아느 사람들이 실제로 살 고 있는 곳을 숨기기 위한 장소이다. 무엇보다 이 때는 시키들과 아느인과의 전쟁이 종료된 때가 아니다. 그리고 아느 사람들 입장에선 누가 배신자고 누가 시키들에게 정보를 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유라시아 대륙 곳곳에 퍼져있는 아느인들은 서로 다른 지역의 아느 거주지에 다가갈 수가 없었다. 외부인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중계지에 선돌, 멘히르를 세우고 그 곳에서 정보 및 물자 교환을 했다. 독특한 각자의 본거지, 거주지까지는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현재의 카자흐스탄에도 중계지가 있었고, 티벳에도 있었다. 중계지의 크기는 각각 다 다르고 문화와 시대 모든 게 달랐다. 시대마다 다르고 형태와 구조도 수 없이 변천했다. 커지기도 작아지기도 했기에 어느 정도 크기다라 말할 수 없다.
한편 아사달의 의미는 시기에 따라 달라졌다. 한웅과 마한 입장에서는 중계지이지만 이후 혼혈이 된 고조선 이후 입장에서는 상징적인 곳이었다. 마치 미국인들 입장에서는 뉴욕은 많은 도시 중 하나지만 외국인들 입장에선 미국의 성지인 것과 같다. 혼혈화 시대가 되어버리니 아사달은 성스러운 지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석가모니 입장에서 보리수가 신령스러워서 간 것이 아니다. 단지 그가 보리수 아래에서 성불했기에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그 자리가 성스러운 것이 된 것과 같다.
아사달은 몇 천 년 동안 중계지로 사용되었음에도 안전했다. 그래서 고조선을 준비할 때 아사달을 기반으로 삼아도 되겠다 생각했던 것이다. 이에 고조선 당시에도 아사달은 제천행사 지역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