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시작
기원전 1만1천년 경, 서해는 육지였다. 하지만 서해평원에는 남북을 흐르는 거대한 강, 마한강이 흘렀고 마한강의 동쪽은 대륙과 단절되어 있었다. 마한강은 황하와 요하가 만나 내려오다 압록과 합치고 그것이 다시 대동강과 합류한 다음 한강과 합쳐졌다. 그리고 장강과 합쳐진 이후 남쪽으로 흘러가 바다에 합류하였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강이 바로 마한강이었다. 한편 당시 요하는 북만주에서 시작되어 황하보다 더 길었다.
바다 같은 마한강을 따라 당시 태풍은 만주 위쪽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지금의 태풍과 달리 범위가 수천 km에 달했다. 그러나 오히려 세기는 약했다. 결과적으로 당시 동북아는 우기와 건기로 나뉘어졌다. 당시 몽고는 사막이 아니었고, 황하와 요하를 따라 내려오는 물은 엄청났다.
결과적으로 마한땅은 매우 비옥했다. 황하를 따라 풍부한 황토가 내려오고 만주의 초지에서 엄청난 유기물이 흘러왔다. 압록, 한강에선 한반도의 미네랄이 내려와 쌓인 곳이 바로 서해이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인의 밥상을 책임지는 서해안 일대의 토질이 좋다고 하지만 서해의 흙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지경이다. 언제나 풍년이었고 마한사람들은 여유가 있었다.
바다처럼 거대한 마한강은 마한땅을 섬처럼 만들어줬다. 남북을 관통하는 마한강은 바다처럼 넓고도 물살이 세어서 당시 기술로는 건널 수가 없었고, 압록, 금강, 한강 등 동에서 서로 흐르는 강은 매우 깊은 협곡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대륙에선 시키와 아느 사람들간의 끝없는 전쟁이 있었으나 마한땅은 알려지지 않았다.
마한은 마한강 동쪽에 많은 도시를 만들었다. 우선 마간을 기준 마한강의 서쪽, 산둥반도 근처에 마간을 보호하는 수호도시를 몇 개 만들었다. 그리고 청천강 하류를 최북단으로 놓고 아래로는 제주도 인근까지 도시를 세웠다. 최근 발견된 부산 가덕도 유골 역시 마한의 흔적이다. 동시에 가덕도에서 왜 유럽형 유전자가 나타나는 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시키의 침략 이후 우리는 동쪽으로 이동했으나 대부분의 아느 사람들은 서쪽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마한땅은 풍족했고 또 안전했다. 그 상태에서 삼백만명의 인구가 오륙천년이 지나면 얼마나 많은 수로 불어났을지 쉽사리 상상할 수 없다. 물론 이들 역시 바이칼로 이동한 한린 사람들처럼 평생에 걸쳐 서너명의 아이만 낳았을 뿐이다. 하지만 한린은 시키들과의 계속된 전쟁으로 많이들 사망했으나 마한은 위협 요소가 없었다.
기 께서는 위협을 예상하시고 순박한 사람 마그들 300만명을 대륙의 동쪽 끝으로 보냄으로 시키들과의 끝없는 전쟁에서 보호받을 수 있게 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평온은 영원하지 않았다. 기원전 6000~5000년 경 갑자기 서해안으로 바닷물이 치밀어 온 것이다. 마한의 중심인 ‘마간’이 바다 속으로 잠겼다. 그와 동시에 마한의 지도자들과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물에 잠기게 되었다. 살아남은 지도자는 마한의 변방(지금의 충청도, 전라도 등지)에 있던 마을 촌장 정도였다. 백성들만 살아남은 마한은 더욱 ‘생존’에만 치중할 수 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아느에서 가져온 마한의 기록은 수도 마간에 보관되었는데 이것들이 모두 바다 속에 잠기게 된 것이다. 1만 1천년 되었다고 알려지는 충북 청주 소로리 쌀 유적은 당시 마한 기준에선 변방이였다. 또한 최근 발견된 가덕도 유물과 대마도 인근의 요나구니 해저피라미드 역시 마한의 유물이다.
마간이 물에 잠긴 때는 기원전 6000에서 기원전 5000년 사이이다. 하지만 배달 한국이 바이칼을 떠나 남쪽으로 출발했던 게 기원전 6천년 경이다. 당시 한웅은 바이칼을 기점으로 삼고 있었고, 남쪽 사막을 건너 소금과 식량을 찾는 게 목표였다. 그들이 산동에 도착했고 그 곳에서 마한의 백성들을 만났다. 한웅이 내려왔을 땐 이미 마간이 사라진 이후 였는지에 대해선 불확실 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한웅의 남하와 마간의 수몰이 유사한 시점이었다는 것과 얼마 지나지 않아 마한의 지도자가 사라진 것, 그리고 순혈을 주장하는 많은 사흐들이 순혈인 마한 사회에 편입되었다는 것이다.
해당 사건으로 마한의 문명이 매우 쇠퇴했다. 수많은 마그, 지도자들, 국가의 중추에 있던 이들이 한 순간에 모두 사라졌다. 지금 시대로 비춰본다면, 만약 갑자기 대학졸업자 이상의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다고 생각해보라. 그 이후 문명 유지가 가능할 것인가? 도구는 어떻게 만들 것이며 공장을 돌릴 수 있겠는가? 마한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 수준이 확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마간의 유적은 갯벌에 잘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많은 것들이 평편하게 다듬어진 돌에 새겨져 있다. 그것을 다시 꺼낼 수 있게 된다면 마한사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항카호에는 부여에서 가지고 온 것들이 남겨져 있다. 하지만 마간에 있는 것들이 닝구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통일과 상관없이 꼭 되찾아야 할 우리 상고사 기억이다.
항카호의 닝구르, 수몰된 마간, 수몰된 고조선의 왕검성, 세종대왕의 모자, 세종대왕께서 연구실로 사용하셨던 연기나지 않는 굴뚝을 찾는다면 잃어버린 우리민족의 기원을 되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세종대왕의 모자는 지금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박물관에 고이 모셔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보로 지정된 세종대왕의 모자를 뜯는다는 것은 결코 허락받기 어려울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이유 중에 하나가 세종대왕의 비밀을 열어보는 것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잠깐 이 모자에 대해 짚으면 당에서 세종대왕에게 준 선물이다. 찝찝한 점이 있긴 하나 당에서 준 것이기에 세종대왕은 ‘이 모자가 가장 안전하게 후대까지 전달될 수 있는 것 중 하나‘라고 생각하셨다. 그리고 며느리에게 시켜 종이를 모자 안에 넣게 하셨다. 그 종이는 눈으로만 판단할 게 아니다. 세필과 각필이 함께 있기에 만져가면서 독해해야 할 것이다. 숨겨진 종이에는 한글의 창제원리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근원인 아느 이야기 또한 담겨져 있다.
이 사건 이후, 마한은 생존에만 집중했다. 살아남은 마한은 마을마을 마다 목책을 둘렀다. 그리고 검치, 호랑이나 늑대도 뛰어넘지 못할 만큼의 해자를 팠다. 그리고 들어오는 길은 빙글빙글 돌렸다. 직진으로는 결코 마을로 들어올 수 없었다. 그리고 망루에서는 활을 들고 감시를 했다. 한반도 전체에 녹아든 마한은 그렇게 생존을 이어갔다.
지배자가 사라진 마한은 수 천년 간 새로운 지배자를 옹위하지 않았다. 다만 선거를 통해 리더를 뽑았을 뿐이다. 이번에는 어느 마을이 리더, 이번에는 어느 마을이 리더 이런 식이었다. 이후 백제가 설립되었을 때의 리더가 목지국의 촌장이었다.
마한 사람들은 기골이 장대하고 이목구비가 분명하고 피부가 뽀앴다. 그래서 마한 사람들이 잘 쓰는 무기는 쌍도끼였다. 마한의 여성들이 사용하던 무기는 활이었다. 만약 올림픽에 쌍도기 던지기 종목이 생긴다면 마한의 핏줄을 이은자들이 두각을 나타낼 것이다. 여성들은 목책 안 망루에 올라가 있다가 활을 쏘았다. 지금도 남성보다 여성들이 활을 더 잘 쏜다. 그런데 기록에서 보면 우리나라 여성들이 활을 쐈다는 얘기는 없다. 하지만 기원전 1만년 전부터 삼국시대 마한이 없어질 때까지 만년이 넘는 동안 여성들이 활을 쏘았었다.
여성들의 활은 주로 싸리나무였다. 남성들의 활은 목각으로 만든 것이라면 여성의 활은 싸리나무, 뽕나무, 물푸레나무, 오동나무로 만들었고 화살은 싸리나무로 만들었다. 활은 싸리나무, 뽕나무, 물푸레나무를 똑같은 모양으로 오린다. 오린 다음에 찹쌀 풀을 이용해서 나무를 3겹으로 붙인 다음 돌에다 몇 년간 재워 놓는다. 그러면서 옻칠을 해뒀다. 남성들과 달리 코뿔소, 고래힘줄 같은 걸 사용하지도 않았다. 쇠로된 촉에다 꿩 깃털을 사용했던 남성들의 화살과 달리 여성들의 화살은 그냥 싸리나무를 깎고 깨 기름칠을 했다. 활촉도 쇠를 박는 게 아니라 숯에다가 놓고 기름 먹인 후 두드리는 것으로 끝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만든 여성들의 화살이 쇠로 만든 남성들의 것보다 더 가죽을 잘 뚫었다. 뿐만 아니라 두꺼비를 약 올린 다음 부풀어 오른 두꺼비 독을 받아서 화살 끝에 발랐다. 이 화살을 맞은 적은 마비되었다. 팡 하듯이 망치로 때리는 느낌의 남성의 활과 달리 팅 하면서 탄성 좋고 가벼운 여성의 활은 쉽게 당겨지고 쉽게 복원되었다.
또한 사용하지 않을 때 남성의 활은 고래 힘줄을 풀어 반대로 걸어놓아야 했는데, 여성의 활은 그냥 그대로 걸어두면 되었다. 예전 우리의 문은 싸리문이었다. 근데 이게 마한의 전통이다. 싸리를 뽑아서 화살로 만들면 되기 때문이다. 목책 바깥에 싸리나무를 키웠던 마한의 풍습이 전해진 것이다. 특히 싸리는 온도만 맞으면 계속 자라기에 화톳불 옆에 싸리나무를 두어서 겨울에도 자랄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이러한 마한의 모습은 사료도 없고 유물도 모두 사라져 버렸을 뿐이다.
지금의 여성 아이돌의 옷차림은 마한의 여성들과 참 닮았다. 마한의 여성들은 부츠 같은 가죽 신발을 신었고, 길지 않은 속바지와 무릎까지 내려오는 두루마기, 허리까지 내려오는 도포를 입었다. 짧은 치마를 입고 춤추는 아이돌과 비슷하다. 긴 머리를 묶고 활 하나를 들고 뛰어다니는 여성의 모습이 마한여성이다. 당시 와족의 평균키가 140, 150cm 대였는데 마한 여성은 평균키는 160cm 대 였다. 십 대의 마한 여성들은 이미 원주민들보다 컸었다. 지금의 여성들과 비슷하다. 말 타는 것도 좋아했다.
같은 이유로 구월산과 마니산에 제단이 세워졌다. 나중 기원전 1300년 무렵 평양 인근에서 돌아가신 단군 때문에 구월산과 마니산이 활용되긴 하지만 그 이전부터 이 곳들은 성지였다. 왜냐면 구월산과 마니산에서는 수몰된 마간을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사람들은 마한과 와족이 같은 사람인 줄 안다. 와족은 침범해 왔다가 죽으면 죽은 시체를 냅두고 그냥 돌아가 버렸다, 결국 마을에 살고 있는 마한사람들이 이 시체를 치워야했다. 와족의 시체를 처리하는 것은 그냥 땅에다 묻는 것 말곤 방법이 없었다. 풍장이나 조장은 신성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역사 왜곡이 발생한 것이다. 마한의 유물과 와족의 유골이함께 출토되는 아이러니가 지금의 사태다. 여기서 와족은 맥족과 예족이다.
맥족은 호랑이를 타고 백두대간을 너머 만주 이북까지 넘나드는 이들로서 몸은 호리호리한 여성형의 사람들이다. 반면 예족은 둥그런 얼굴에 둥그런 몸을 가지고 산 속에서 농사를 짓는 이들이다. 그리고 매우 우둔하며 한번 정한 자리를 이동하는 법이 없다. 내가 정한 밭이 물살에 쓸려 나가 버리면, 그 옆 새로운 강변에다 밭은 만들면 될 터인데 굳이 다시 쓸려간 곳에 흙을 채워 밭을 만드는 이들이 예족이다. 예족이 맥족에게 농산품 등을 상납하는 경우가 있긴 하나 이 들은 전혀 다른 종족이며 혼례로써 교류하는 경우는 없었다. 이에 한국인을 예맥족이다 라 규정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마간이 수몰된 이후, 충청도나 전라도 평야가 가장 유사한 토지를 가지기에 이곳으로 많이 정착하게 되었다. 겨우겨우 살아남았지만, 마한사람들은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받게 되었다. 여신의 명을 받아 동쪽 끝에 자리잡고 다시 아느에서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찾아온 물벼락에 지도자와 문명을 모두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자책할 수 밖에 없었다. 과연 무엇을 잘못했기에 천벌을 받아야만 했던 것인가.
당시 한반도는 네트워크가 끊어져 있었다. 마한은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되어 있었다. 고조선이, 아사하니들이 한반도로 들어오면서 한반도까지 네트워크가 연결되었다. 아사하니들은 알고 있었다. 이미 아느가 멸망하기 몇 년 전, 동쪽으로 떠난 아느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한반도에 도착해서는 마한사람들이 바로 그들임을 알았던 것이다.
반면 서기 1800년대에도 동쪽 끝 아느의 후손을 찾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늘의 자손이 맞냐고 물었지만 이 땅의 사람들은 아니라고 했다. 하늘의 자손이 아닌 중국의 일부라고 답했던 것이다. 그러고선 한반도는 버려졌던 터였다. 일본에서 지팡구라고 하며 자신들이 태양의 자손이라 손들었기 때문이다. 한이란 명칭을 중국에게 빼앗긴 것처럼 제펜이란 명칭을 일본에게 빼앗긴 것이다.
기원전 5500년 이전, 인도, 동남아, 한반도 일대는 해수면의 높이가 매우 낮았다. 반면 대서양 연안, 유럽, 아프리카 서해안은 해수면이 상당히 높았다. 이는 전 세계 해수면의 높이가 일정한 지금의 상황과는 괴리가 크기에 쉽게 떠올리지 못하는 상황이다.
사유는 남아메리카와 남극대륙이 빙하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빙하로 구분되어 있었기에 태평양 동쪽의 해수과 대서양 서쪽의 해수는 막혀있었고, 지구의 자전 덕분에 대서양 서쪽(아메리카 동쪽 연안)으로 바닷물이 쌓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랬던 남극이 기원전 5500년경 어떠한 이유인지는 모르나 남극과 남아메리카 사이를 연결했던 빙하가 녹아버리게 되었다. 막혀있던 대서양의 해수가 태평양으로 급하게 밀려왔고 이내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일대의 해변은 바닷 속으로 잠기게 된다. 중국과 육지로 연결되었던 한반도에 서해안이 만들어졌고, 마한의 도읍지 마간 역시 바다로 잠겨 버렸다.
인도에도 같은 현상이 만들어졌다. 낮았던 해수면 덕분에 동남아이아와 호주는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기에 인도양의 해수면은 일정 부분 물이 적었으나 태평양의 해수면 상승은 동남아와 호주 사이의 물길을 만들었고 이는 인도양 상승으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인도 캠베이만 해저 유적이 그 사례다.
기원전 5500년 경, 사건이 있기 전에는 대서양이 태평양에 비해 약 30~50미터 정도 높았다. 하지만 지금의 고대 연구는 서양 사고를 기준으로 하면서 '전 지구 해수면의 높이가 달랐다'는 것을 놓치고 있다.
기원전 5500년 경, 어느 순간 30미터 정도의 해수면 상승, 하강이 급격히 발생했다. 서서히 서서히 올라오던 해수면이 갑자기 올라가 버렸다. 서해의 중앙에 있었던 마간 사람들은 그대로 수몰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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