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10800, 생존하라.

한민족의 시작

by 한임

무언가 변고를 예상하셨던 기께서는 시키의 공격이 있기 전, 순박한 사람들 마그들을 동쪽 끝 땅으로 보내셨다. 기원전 1만 1천 년 경, 아느를 출발한 300만 명의 마그들은 동쪽으로 이동했다. 이동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당시에는 타클라마칸 사막도 중국 동쪽 연안의 대습지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와 달 그리고 별을 기준으로 잡고 동쪽으로 직진한 이들은 빠르게 한반도에 도착했다. 그리고 요하와 합쳐진 황하와 압록 그리고 대동강을 품은 한강이 만나서 서해안을 내려가는 거대한 강, 마한강의 동쪽 너른 평야를 발견했다. 평야 중 약간 높은 구릉에 도시를 건설했다.


마한의 정식 명칭 : 마그한, 동쪽으로 이동한 마그

마한의 사람들 : 마아가니, 사람-무리에는 ‘이’라는 어미를 붙였다.

마한의 수도 : 마간


아느에서 기술자, 과학자의 역할을 하던 이들을 마그라고 불렀다. ‘생존하라’라는 여신 ‘기’의 명을 받아 동쪽 끝 3개의 강이 만나는 곳으로 이주한 마그들은 지금의 산둥과 황해도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산둥과 웅진을 그어서 웅진 쪽으로 삼분의 일 위치 또는 산둥과 서산을 이어서 서산 가까운 곳에 마한의 수도 마간이 정한 것이다. 이미 당시에도 서해는 뻘이었기에 도시는 돌로 이루어졌다. 바닥에 돌을 깔고, 다시 돌로 집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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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넓은 평원에 기반을 다지고 벼, 콩, 삼베 등의 농경문화를 구축했다. 마간이 수도였고 주변으로 농경지를 넓혀나갔다. 당시 마한은 중국과 육지로 연결된 넓디넓은 평야였으며 마한의 땅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황토고원의 황토, 압록과 한강의 미네랄, 요하의 습지에서 만들어진 유기물, 이 세 가지가 수백만 년 동안 버무려져 만들어진 땅이 마한 땅이었기 때문이다. 나일 삼각주, 세계적인 곡창 비교도 안 되었다. 마한의 흙은 달다고 할 정도였다. 그래서 마한에서 세계 최초의 벼농사가 이루어졌다. 당시 논의 개념이 없었으나 기술자들인 마그들에게 논을 만드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땅 만들고 씨 뿌리면 끝이었다. 당시엔 볍씨를 뿌리면 잡초라곤 피와 기장이었다. 하지만 당시엔 피와 기장도 먹었으니 벼를 뿌리면 덤으로 피와 기장이 수확되는 것이었다. 소로리는 변방의 논경지였을 뿐이다.



지금도 서해안에는 섬이 없다. 1만 년 전 마간은 그냥 평지였다. 마간에서 가장 가까운 산은 황해도 구월산일 정도였다. 당시 가장 힘든 것은 돌 나르는 것이었다. 마간을 지을 때, 구월산에 가서 돌을 깨고 평편하게 만들어서 가지고 왔어야 했다. 근데 땅이 평편해서 돌이 잘 끌렸다. 마한의 땅은 마차 이동이 곤란했다. 길을 만들어 봐도 땅이 물을 머금으면 다시 풀이 자랐기에 곧장 길이 사라졌다. 무엇보다 수 백 미터 두께의 푹신한 땅이었기에 넓은 면적의 땅을 다지는 건 불가능했다. 수도는 좁은 지역이기에 바닥에 나무를 촘촘히 박고, 그 위에 돌을 깔아서 평편한 땅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돌로 집을 지었다.



마한강은 바다와 같이 거대한 강이었다. 거대한 해자였다. 이에 마한강의 서쪽, 산둥 근처에 마간을 방어하는 군사도시를 몇 개 세우고 많은 수의 도시들이 마한강의 동쪽에 지어졌다. 300 만 명이라는 거대한 인구는 곧장 서해안 일대를 너머 남해안, 제주도, 대만 근처까지 뻗어나갔다. 최근 발견된 가덕도 유골과 대만 인근 요나구니 해저유적이 그 흔적이다.



거대한 마한강을 삼백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넘어간 것은 마그의 기술과 거대한 새 게브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그들이 마한을 찾아 동쪽으로 이동할 때는 아직 아느가 온전한 상태였기에 마한은 이동하면서도 아느와 소통할 수 있었고, 게브에게는 겨우 하루거리 밖에 안 되는 곳이었기 때문에 거대한 마한강을 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침략자는 없었으나 가끔 침입하는 와족들이 귀찮게 할 뿐이었다. 이들은 한반도 구석기 원주민일 뿐이다. 당시 마한은 마을에 살면서 죽으면 조장을 하는 풍습이 있었다. 뼈까지 갈아서 공중으로 뿌렸기에 마한의 유골은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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