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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Jul 27. 2023

웃는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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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오늘 왜 이렇게 시크해?”

“뭐가?”

 그는 내 표정을 살피듯 묻고,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질문 같지만, 질문이 아니고 대답 같지만, 대답이 아니다. 내가 뭔가 기분이 상했음을 눈치챈, 그만 풀었으면 하는 그의 신호이며, 아직은 그럴 수 없다는 나의 신호이다.      


나는 대체로, 늘 웃는 사람이다. 매일 아침, 웃음이라는 옷을 찾아 입고, 혹은 걸칠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선다. 반가운 이를 만나 즐거운 순간은 물론이며, 낯선 사람 앞에서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할 때도 슬며시 입꼬리를 밀어 올린다. 일터에서 의사소통이 잘 안 되어 답답함을 느낄 때도, 뭔가 부끄럽거나 멋쩍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조차도 미소로 무마하려한다. 웃음은 내게 교복과 같다. 조금은 덜 소심하고, 덜 낯가리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 나는 매일 교복을 입는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교복을 벗지 못한다. 오히려 명랑함이라는 스카프를 두르고 온화함이라는 장신구로 치장한다. 조금은 과장된 친절로 포장된 내가 가족을 맞는다.

“잘 다녀왔어? 오늘 하루는 어땠어?”

아이는 방긋 웃으며 종알종알 이야기를 들려줄 때도 있지만, 인사 한마디 남기고 방으로 들어가 버릴 때가 많다. 서운한 마음을 내려놓고 아침에 남겨진 설거지를 한다. 찌개를 끓이고 나물을 무친다. 세상 다정하게 남편과 아이들을 부른다.

“밥 먹자~ 식사 준비 다 했어. 어서 나와~”

 몇 번을 불러야 식탁으로 다가오는 남편과 아이들. 함께 둘러앉아, 저녁을 먹는다. 나 하나 노력하면 가정이 평화롭다.     


물론 매일 평화가 유지되지는 않는다. 유난히 일터에서 지쳐 돌아온 저녁에는,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핸드폰 화면만 들여다보는 아이에게 서운하다. 남편의 대답이 조금만 까칠하게 느껴져도 벌컥, 화가 난다. 가족들은 내 노력을 알기는 하는 걸까? 엄마의 친절과 희생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의심이 밀려든다. 피곤한 몸을 견디며 준비한 저녁 식탁 앞에서, 함께이지만 혼자라고 느낀다. 스르르 웃음이 벗겨지고, 냉담한 표정으로 갈아입는다. 침묵이 이어진다.     


결혼 10년 차에, 나는 암을 진단받았다. 육아와 직장 일을 병행하느라 체력 소모가 커서였는지, 워낙 내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는 일에 서툰 내가 화병을 키운 것인지,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수술과 항암치료를 거치면서, 나도, 남편도 자꾸만 지쳐간 것은 분명하다. 서로에게 짜증이 늘고 사소한 일에 다툼이 이어졌다. 서로 말을 않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건 교통사고처럼 정확하게 몇 대 몇으로 유책 비율을 짚어낼 수 없는, 복잡한 문제였다. 우리 관계는 타오르는 불구덩이 속으로 치달았다가,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순간들이 반복되었다.     


당시에 나는, 내가 아픈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건강한 몸으로 돌아가지 못할까 봐, 그래서 내 쓸모를 잃고 모두에게서 버림받을까 봐 겁도 났던것 같다.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과거에 매달렸다. 남편이 조금만 더 역할 분담을 해주었다면, 일과 육아를 병행하느라 힘든 나를 헤아려주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원망이 자라났다. 남편은 갑작스러운 아내의 부재로 본인의 늘어난 역할을 감당하느라 나름대로 쉽지 않았을 텐데, 나는 애쓴다, 고맙다, 그 한마디를 하기가 어려웠다.     


서로에 대한 서운함이 쌓이고 쌓여 극단적인 선택을 고민하게 되었을 때, 우린 마지막으로 부부 상담을 받아보기로 했다. 상담사의 중재하에 진행되는 이야기는 조금 더 객관적으로 서로의 입장 차를 들여다볼 수 있게 했다. 극단의 상황으로 치닫던 오해가 이해하는 마음으로, 조금씩 돌아섰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기를 바라고, 기대가 어긋났을 때 혼자 상처받아 온 마음들. 우린 어쩜 그렇게 똑같았는지. 서로를 이해해 가는 만큼이나, 나 스스로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갔던 시간. 비록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그 한 자락을 붙들고 다시 살아보기로 했다.


 “엄마가 행복해야 가정이 행복하죠.”

상담사가 한 말의 의미는 아마도, 내가 스스로 내 행복을 찾아야 온 가족이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꼭 엄마일까? 아빠가 행복하면 가정이 행복하다는 말은 왜 없는 걸까? 직장에서는 여자라고 티 내지 말고 똑같이 일하기를 요구받는데, 퇴근하면 저녁 메뉴를 고민하고, 아이들의 준비물과 학원 스케줄을 챙기고, 귀가하는 가족들을 명랑하게 맞이하는 것 모두, 엄마의 몫이어야만 하는 걸까?      


누구도 드러내 놓고 강요하지 않지만, 은연중에 규정되어 온 엄마의 역할이 무겁다. 엄마의 기분과 태도가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이야기는 신화처럼 전해져 오는데, 엄마는 신이 아니다. 몸이 아플 수도, 마음이 다칠 수도 있는 불완전한 인간일 뿐이다. 공기 중에 녹아 흐르는 ‘엄마’라는 타이틀이 주는 중압감에, 가끔은 숨쉬기가 버겁다. 교복이 몸을 조여 오고, 스카프도, 장신구도 무겁고 거추장스럽기만 하다.      


 “여보, 나 음식물 쓰레기 버리고 왔어. 잘했지?”

시간이 많이 흘렀다. 내게 엄마, 아내, 며느리로의 역할에 대한 기대가 많았던 남편은, 우리 가족사의 험난한 시기를 겪어내면서 조금씩 변해 왔다. 하지만 여전히, 집안에서 주도적으로 역할을 찾아내기보다는, 아내를 돕는다는 마인드가 베이스인, K-남편이다. 작은 일에도 내 칭찬을 기다린다.      


물론 나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엄마의 노력과 희생을 가족들이 알아주기만 해도 좋겠다. 엄마가 식사 준비를 하면, 가족이 상차림을 돕고, 맛있는 요리를 해줘서 고맙다는 표현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엄마는 세상 가장 만만한 감정 쓰레기통이 아니며, 엄마도 가족 안에서 서로의 입장 차를 중재하고 이해하는 일이 늘 쉽지는 않음을 인정해 주기를 바란다. 가족들이 힘들 때 엄마가 이야기 들어주고 위로하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엄마가 지치고 우울할 때도 함께 해주기를, 지지해 주기를 원한다.      


 ‘돌봄’은 엄마를 비롯한, 여성의 고유 역할이 아니다. 모두가 그것을 알고 실천할 날을, 돌봄을 받는 이와 돌보는 이를 구분 지을 필요 없는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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