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잠든 사이, 내 몸속 한 부분이 사라졌다.
서른아홉 해를 나의 일부로 함께 했던 존재의 사라짐. 헤어짐을 예고하는 약간의 암시라도 있었다면, 덜 허전했을까? 열세 살부터 끊임없이 나를 아프게 했고,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선물인 아이들을 만나게 해 준, 자궁을 잃었다.
수술 이튿날 회진을 나온 의사는 내게, 어쩔 수가 없었다고 했다.
“이미 아이도 둘 있으시고, 출산 계획이 또 있으신 건 아니잖아요? 이제 뭐 없어도 큰 지장은 없잖아요? 그죠?”
빙글빙글 웃음기 어린 표정 앞에, 나는 그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순간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이미 벌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는 일에 익숙한 나, 분노보다 체념이 더 쉬웠던 나. 지금 생각하면, 억울하고 서글픈 기억.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그에게 무슨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냐고 따져 물을 수 있을까?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벌렁거린다.
어느 날 갑작스러운 옆구리 통증으로 병원을 방문했을 때, 의사는 내 난소에 혹이 보인다고 했다. 혹이 이렇게 커지도록 뭘 했냐며, 나무라기까지 했다. 나는 그때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진료실을 나왔고, 대기실에 나와 혼자 눈물을 훔쳤다. 의사의 지적이 없었더라도, 나는 아마 내 한 몸 내가 제대로 건사하지 못했음을 자책했을 것이다. 그렇게 배웠으니까. 건강 관리도 능력이라고, 공부도, 일도, 사랑도 모두 자기 하기 나름이라고, 내 머릿속에 각인처럼, 새겨져 왔으니까.
일과 육아를 병행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던 하루하루. 출산 이후에도 산부인과는 방문하기 편안한 곳이 아니었다. 울컥울컥 덩어리 진 피가 주기적으로 내 몸에서 쏟아지고, 통증이 심해서 배를 움켜잡았던 날들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지만, 그저 습관처럼 아픔을 참았다. 진통제를 남용하면 좋지 않다는 말을 액면 그대로 믿었고, 그래서 매 순간을 견뎠다. 가정과 직장,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가 되지 않으려 매 순간 애쓰면서 살았는데, 내 몸에 찾아온 종양조차도 다 내 잘못만 같았다.
의사는 다행히 의술이 좋아져 ‘복강경’이라는 간단한 수술로 혹만 제거하면 된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배를 열지 않고, 작은 구멍 안으로 기계를 넣어서 하는 수술이라, 하루 이틀이면 회복 가능하다고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또 의심 없이 믿었다.
마취에서 깨어보니 뭔가 이상했다. 수술도 예상보다 오래 걸렸고, 배에 느껴지는 통증도 생각보다 심했다. 의사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막상 복강경 수술로 진행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다고 했다. 결국 배를 열어 혹을 잘라 내었고 조직검사를 했는데, 악성 종양으로 밝혀졌다고 했다. 암의 전이를 막기 위해 자궁까지 제거하기로 결정이 내려지는데, 내 의견이 들어갈 틈은 없었다. 나는 나중에 들어야 했다. 내 몸에서 일어난 일인데도, 그 순간에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 결정이 정말 최선이었을까? 수술의 효율성을 높이는 측면의 최선 말고, 병이 확장되는 것을 막기 위한 최선 말고, 출산의 역할을 끝낸 자궁이라는 기능적 측면에서의 최선 말고, 적어도 나라는 사람의 존엄성 측면에서의 최선 말이다.
당시에 나는 의학적으로 무지했고, 스스로 내 몸을 돌보는 일의 소중함도 잘 몰랐지만, 그래도 나와 상의해야 할 문제가 아니었을까? 적어도 내가 선택할 수 있도록, 수술 후 내게 찾아올 몸의 변화에 대한 설명이 있었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것이 의사의 역할이 아닐까?
이어진 항암치료 과정을 되짚어 보는 일은, 끊임없이 몰아치는 파도에 부딪고 또 휩쓸리는 모래알을 헤아리는 시도와 같다. 출구 없는 고통에 쓰러졌다가, 다시 허망한 물보라 끝에 매달려 일어났던 순간들. 커튼 너머로 들리는 옆 침상의 흐느낌으로 아침은 시작되고, 병실의 온갖 음식 냄새에 메스꺼움을 견딜 수 없어 오래 서성이던 복도의 서늘함으로 낮이 이어진다. “환자분, 좀 어떠세요?” 간호사들의 조심스러운 목소리, 잠 못 드는 사람들이 화장실을 오갈 때마다 삐걱대는 문소리, 오래 묵은 병실 냄새 같은 것들로 밤이 채워졌다.
빼꼼, 안방 문이 열린다. 까만 눈이 웃는다.
“엄마, 많이 아파?”
“아니, 괜찮아.”
아이는 내 희미한 미소에 화답하듯 냉큼 내 옆에 와서 드러눕는다.
아이와 눈을 맞추는 짧은 순간, “엄마, 안 심심해? 나 오늘 학교에서...” 종알종알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다시 문이 열리고, “훈아, 엄마 아파서 들어오면 안 된다니까....”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형아 목소리가 들려와도, 아이는 꿈쩍 않고 누웠다.
“막둥이, 형아 말 잘 듣기로 했지? 할머니, 할아버지 말씀도?” 내 말에 그제야 끄덕끄덕, “엄마, 얼른 나아서 나랑 놀자!” 하고 문을 나선다.
당시 여덟 살, 열 살의 아이들을 부모님께서 맡아서 봐주셨다. 간단한 수술인 줄만 알고 딸의 곁을 지키던 부모님은 수술 중 급박한 상황을 전달받고 다시 보호자 동의서에 사인해야 했다. 이후 나는 제대로 먹지도 못해 면역 수치가 크게 떨어졌다. 항암 치료조차 연기되는 바람에 부모님은 더욱 마음 졸이셔야 했다. 다 키워서 결혼시킨 딸의 암 투병을 지켜보며 손주들을 돌봐야 했던 부모님께, 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죄송했다. 앓는 소리조차 제대로 낼 수 없었다.
왜 하필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암담하기만 했던 시간의 터널 속에서 오래 헤매었다. 투병 이후 내게 주어진 삶은 더 이상 망설임 없이 꾸려나가고 싶었는데, 쉽지 않았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조금씩 일상을 되찾아 나가는 노력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후회와 원망은 오히려 내 몸과 마음을 갉아먹는 일임을 이제는 알겠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뀐 내 몸을 인정하고, 화해하는 길을 찾는 일이 앞으로의 숙제가 될 것이다.
억울하고 화나는 마음을 직면하고 토닥이기. 지금 내게 허락된 선에서 나를 돌보며 행복을 찾기.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작은 순간들을 즐기고 감사하기. 그렇게 헛헛한 내 몸의 한 자리를 조금씩 메꿔나가고 싶다. 정확한 지도도, 나침반도 없지만, 길 찾기를 포기하지 않기로 한다. 잃어버린 것에 연연하기보다, 이제라도 내 마음과 몸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아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