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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Nov 14. 2023

가을 편지

우리가 함께 한, 또 함께 할 계절

“하니야~”

당신이 부르던 목소리가, 지금도 등 뒤에서 들려올 듯해요.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내게, “하니야, 뭐 하니?”라고 말하던 당신의 장난스러운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답니다. 나는 당신을 그날 모임에서 처음 만난 터라, 당신의 개그 코드를 얼른 이해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는 일에 서툴렀던 내게, 먼저 말 걸어준 당신이 얼마나 고마웠던지요.


당신은 지금 저 멀리 내 앞에서 걸어가고 있어요. 주말에 핑크 뮬리가 보러 가겠냐고 먼저 말을 꺼낸 건 당신이었죠. 전부터 핑크 뮬리가 가득 피어있는 공원에 가보고 싶었던 나는 당연히 좋다고 했고요. 전날에 나는 어딘가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배경 한가운데 내가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설레기까지 했답니다.      


“우와~~” 누구보다 먼저, 큰 소리로, 연신 감탄사를 뱉는 당신이에요. 처음 연애할 때는 당신의 그런 스스럼없는 모습들이 나와 너무 달라서 신기하기도 하고, 때로는 부끄럽기도 했었지요. 오랜 세월 당신과 함께 살다 보니 닮아가는 것인지, 나이를 먹으면서 성격이 변하는 것인지, 나도 요즘은 꽤 감탄사가 늘었어요. 하긴, 누구라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기도 했고요.      


공원에 도착하자 ‘천일홍 축제’라는 입간판 뒤로, 층층이 다채로운 색의 계단이 눈앞에 펼쳐졌어요. 마치 칸칸이 물감을 풀어놓은 팔레트 같기도 하고요. 바람에 나부끼는 꽃들의 흔들림이 파도처럼 밀려드는 느낌도 들었어요. 걷다 보니, 드디어 핑크 뮬리 꽃밭이 나타났어요. 여기저기서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들 틈 어딘가에, 나도 어색한 포즈를 취했고요. “하나, 둘, 셋.” 당신이 찍은 사진을 내게 보여주러 다가왔지요.     


“카메라 각도를 이렇게, 조금 기울이라니까, 매번 이렇게 사람을 납작하게 찍어 놓으면 어떡해?” 나도 모르게 볼멘소리가 나갔고, 그날 나는 당신의 표정이 얼핏 일그러지는 것을 미처 보지 못했네요. “내가 찍어줄게. 거기 서봐.” 나는 꽃밭 앞에 당신을 세워놓고, 내가 원하는 구도를 담았어요. “봐봐, 이렇게, 길어 보이게 찍으란 말이야.”      


당신은 그런 왜곡된 모습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던가요? 뾰족한 말 한마디를 던져놓고, 성큼성큼 혼자 걸어가는 당신의 등을 바라보는 내 안에 찬 바람이 휑하니 지나가네요. 순식간에 나를 납작하게 만들어버린 당신. 당신의 얼음장 같은 태도는 늘 나를 춥게 해요. 공원 군데군데, 사람들의 구둣발로 짓이겨진 꽃들처럼, 기대로 가득 찼던 내 마음은 오래전 기억 속에 묻어 두었던 심연으로 곤두박질치고 맙니다.     


가을은 아침, 저녁으로 온도 차가 극명해지는 계절이지요. 가을이 오긴 온 모양이에요. 우리가 함께 걸어온 시간 속에서, 따사로운 봄도, 뜨거운 여름도, 급격한 온도 차로 힘든 가을도 늘 있었지요. 가을이 지나면 혹한의 겨울이 또 오겠지요. 그러나 겨울은 또 추운 만큼 서로 곁에 꼭 붙어서 체온을 나누어야 하는 계절이기도 해요. 곁을 지켜줄 서로가 함께라는 사실에 감사하는 마음을 배워야겠죠.     


항암치료 중에 내 머리카락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빠지기 시작했을 때, 우린 함께 미용실을 찾았지요. 얼마 남지 않은 내 머리칼을 모두 밀어 버렸던 날, 막상 나보다 당신이 더 많이 울었던 것을 기억해요.      


울긋불긋 화려하게 물드는 가을을 맞으러 갔다가, 혹한의 겨울을 만나고 돌아온 길.

완고한 벽 앞에서 작은 문 하나, 찾아 헤매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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