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날 Dec 31. 2023

세 명의 애인과 함께 살아요.

눈이 소복소복 내리던 날

 나에게는 세명의 애인이 있다.     


 만난 순서대로 하자면 첫 번째인 그는, 내 마음 순위에서는 자주 세 번째에 놓이곤 한다. 두 번째, 세 번째로 나의 애인이 되었던 그들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내게 운명으로 다가왔으며, 지금까지도 내 마음의 순위 첫 번째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고 있다. 둘이 공평하게, 그러나 가끔은 엎치락뒤치락, 1, 2등을 놓치지 않는 그들에 비해, 그는 자주 내게 홀대받곤 했다.      


 어쩔 수 없지 않나? 그는 어른이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애인은 아직 어린아이들이었으니까,라고 나는 나 자신을 정당화하곤 했다. 그가 가끔 그들을 향해 질투심을 드러낼 때도, 나는 오히려 그를 비난했다. 어른답게 행동하라고. 나의 다른 두 애인은 당신의 경쟁 상대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돌봐야 할 존재라고.      


 내게는 언제나 1순위였던 그들이, 어느새 나보다 키가 커지고, 나보다 중요한 사람들이 생기고, 내 생각에 반대 의견을 내세우기 시작하면서,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으나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아니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그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제도 세 번째 애인과 의견 대립이 생겨, 한바탕 날 선 대화를 주고받았던 밤을 보냈다. 내가 또 과민했나? 그렇게까지 뾰족하게 말할 일이 아니었는데... 후회와 섭섭한 마음이 혼재한 채로 깨어난 다음 날 아침, 마침 주말이라 침대에서 한참을 뒤척이다가 거실로 나왔더니 첫 번째 애인이 내 손을 잡고 베란다 창으로 이끈다.


 “여보, 눈이 와.”

 온 세상을 하얗게, 가만가만 덮어주고 있는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젯밤의 일들이 터무니없이 작게 느껴진다. 사람의 일이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일 투성이인데, 나는 또 그게 뭐라고 그렇게 흥분했던 것일까, 반성하는 마음이 된다.     


 “눈이 참, 예쁘게 오지?”

 나는 한 마리 순한 양처럼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남편을 바라본다.

 “어, 근데 어쩌지?”

 “뭐가?”

 “나 오늘은 꼭 요가 갈려고 했는데. 눈이 많이 와서 못 가겠는데?”

 그는 내 속셈을 다 알겠다는 듯, 빙긋 웃으며 말한다.

 “괜찮아. 마을버스 타고 가면 돼. 있다가 나랑 같이 가자.”      


 오랜만에 남편과 둘만, 간단히 아침을 챙겨 먹고 외출을 준비한다. 두꺼운 패딩으로 무장을 하고, 우산도 하나씩 챙기고, 장갑은? 교통카드는? 서로 묻고 확인한 뒤에야 집을 나선다. 밖으로 나오니 포근포근 발에 밟히는 눈의 촉감에, 나는 아이처럼 신이 나서 앞서 걷는다.

 “여보, 우산 위로 내리는 눈 소리 들려? 사그락, 사그락 소리?”

 “응. 들려. 여보 근데 조심해. 미끄러질라.”

 뒤돌아보니, 그는 나를 마치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처럼 바라보고 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또 한편 불안한 그의 시선에, 나는 문득 마음이 하얀 눈처럼 몰랑몰랑해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을 편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