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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희 Dec 28. 2023

떠드는 것도 연습합니다

< 기획자의 아침 _2 >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차가 생겼다. 4학년 겨울방학에 운전면허를 땄고 도로연수를 받자마자 회사차를 운전해야 했다. 내가 들어간 회사에 면허가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회의를 갈 때 만 회사차를 이용했는데 점점 야근이 많아지면서 출퇴근 때에도 내 차지가 되었다. 집에서 회사까지 대략 삼사십 분에서 막히면 한 시간 정도 소요되었고, 나는 그 시간 동안 매일 졸기 일쑤였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혼자 묻고 혼자 답하기 같은 독백쇼였다.      


  “그렇게 생각하신 이유가 뭔가요?     


  영상, 광고, 전시, 이벤트, 창업 등 거의 모든 기획의 순서는 사실상 같다. 어떤 프로젝트건 사업의 개요가 있을 것이고, 해당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기본 방향을 세워야 한다. 다른 유사한 사업과는 차별화된 계획을 마련해야 할 것이며 우리 사업만의 콘셉트나 주제, 그에 따른 스토리, 그리고 그것을 잘 연출하기 위한 세부적인 계획, 이것이 기획의 전부이다. 기획을 한마디로 줄여서 말하라 한다면 벌어진 내 생각을 타이트하게 계획하기 일 것이다. 내 생각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이라면 기획은 보정속옷을 입는다고 생각하면 쉽다. 기왕이면 창의적인 생각을, 체계적으로 계획하여, 감동적으로 펼치고 싶은 것. 기획을 하다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지겹게도 누군가에게 떠들고 설득해야 하는 일이 다반사다. 그런데 내가 가진 생각과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설득하고 공감을 얻어내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좋은 기획자는 대부분 말을 잘하는 편인데 회사를 다녀보면 모든 상사가 긴 설명을 싫어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내가 업무의 필요상 이야기해야 할 순간은 많은데 상대가 제대로 들어주는 순간은 많지가 않다. 내 이야기가 계속 듣고 싶거나 의미 있게 전달되려면 주어진 시간 내에 설명을 잘해야 하고 그러려면 내 생각을 임팩트 있게 가공하여 기회가 왔을 때 전하고 싶은 핵심을 충분히 전해야 한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핵심이 아닌 그 주변부를 설명하다 시간을 다 보낸다. 분명 생각할 단계에서는 기막힌 안이었는데 말을 전하는 과정에서 진부한 스토리가 되는 경우도 있다. 초보일수록 이야기는 내 뜻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앞으로 말할 내용을 예상하며 말을 끊거나 자기가 궁금한 것만 물어보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대하더라도 내 말을 듣는 상대에 휘둘리지 않고 내용의 정확성과 이야기의 매력을 균질한 정도로 전하려면 어떤 연습을 해야 할까.      


  나는 출근하는 차 안에서 내가 구상한 안을 설명하는 연습을 했다. 처음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해본다. 다음엔 십 분짜리, 오 분짜리, 삼분, 일분. 우리가 남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저 사람은 한 이야기를 또 하고, 비슷한 단어를 바꾸어가며 결국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고 느낄 때가 많다. 충분히 설명해야 상대가 이해하기 쉽다고 생각하는 착각에서 비롯된 오류이다. 하지만 경력이 쌓여 지위가 올라갈수록 신입사원에 가까운 직원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첫마디만 듣고도 그다음을 예상할 수가 있지 않은가. 분명한 목소리로, 동어를 반복하지 말고, 장황하지 않게, 특히 끝마디는 절대 흐려지지 않게 설명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상대적이기 때문에 그러려고 했지만 상대의 태도에 따라 내 말투와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 누가 어느 순간에 치고 들어와도 꿋꿋하게 내 맥락을 유지하며 마무리지어야 한다.      


  “50억 규모로 강릉에 건립되는 복합문화관입니다. 발주처는 **이고, 신축이 아니라 기존건물을 리노베이션 하는 경우입니다. 주 타깃은 관광목적의 MZ 세대입니다. 유사한 시설로 제주도의 **센터가 있고, 주제와 스토리는 현재 지역 설화에서 찾고 있는 중입니다. 차별화를 위해 올해 상복이 터진 동화작가를 만나기로 했습니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네다섯 문장 안에서 이렇게 요약해서 말하기 쉽지가 않다. 기획자는 서두와 말끝을 흐리면 안 된다. 문서작업을 많이 하기 때문에 문어체가 구어체로 바뀌었을 때 자신도 모르게 끝말을 흐지부지 마무리하는 경우가 있는데 본인만 많이 한 생각이지 듣는 사람은 처음이다. 또, 생각이 많기 때문에 과감하게 자르고 줄여서 한 문장으로 끊어서 말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느라 정작 본론은 전하지도 못했을 때 회의가 끝나거나, 임원이 자리를 뜰 때도 많다.     


  회의나 보고는 생각의 흐름과 과정을 전달하는 시간이 아니라, 생각의 결과를 내보이는 시간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두세 사람까지 있을 땐 잘 말하다가도 6인용 테이블에 네 사람 이상만 되어도, 혹은 외부 인사만 참석을 해도 공식적인 자리라 생각해 본인이 생각한 것의 반의반도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를 대비해 문장은 짧고 간결하며 정확하게 끊어서 이야기하는 습관을 들여놓으면 좋다. 그리고 내가 이야기하는 그 순서 그대로 다시 문서를 작성했을 때 그것이 곧 기획서고 제안서고 보고서가 됨을 명심해야 한다. 기획서를 작성하는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한 안을 누군가에게 체계적으로 전달하는 순서대로 글을 옮기면 된다.      


  차 안에서 나는 일부러 연락하기 귀찮거나 껄끄러운 상대에게 전화도 자주 한다. 자동차라는 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특성을 갖고 있고, 어디론가 늘 가고 있기 때문일까. 가만히 앉아서 전화할 때보다는 하기 어렵거나 싫은 이야기를 전하기가 수월해진다. 어디를 지나가다가 당신이 생각났다며 핑계를 대기도 좋다. 이때 전화는 받는 사람이 아니라 거는 사람이 주도권을 가지게 된다. 회사에서 전화를 한번 받고 다시 그 이전의 일로 뇌를 가동하는데 15분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설령 상대가 받지 않았더라도 기록이 남으니 어차피 운전밖에 하지 못할 시간에 효율적인 일처리 방식인 것이다.    


  요즘 MZ 세대가 가장 어려워하는 일이 업무적으로 전화를 해야 하는 일이라 한다. 비대면 문화에 익숙한 친구들이 자신의 목소리로 전하고자 하는 말을, 듣고자 하는 말을 얻어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연습하는 것이다. 혼자 있을 때,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공간에서 사과도 해보고, 부탁도 해보고, 대들기도 해 보고, 멋있는 척도 해보는 것이다. 올림픽대로 막히는 구간에서 나는 무언가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에게 똑 부러지게 항변하는 연습을 많이 했다. 혹은 반대로 앞에서는 말하지 못했지만 끝나고 나서 집에 가면서 나 혼자 욕을 실컷 했던 적도 있다. 물론 실전에서는 그만큼 하지 못했고, 어떤 때는 연습하다가 그만 마음이 풀어져 막상 대면했을 때는 그 마음이 지나가버린 경험도 있다. 서울은 늘 복잡하고, 어디든지 막히며, 누구라도 바쁘다. 깐깐한 도시에서 나만의 차 안은 꽤 아늑한 공간이다. 


내 전화의 8할은 운전하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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