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자의 아침 _3 >
토요일 7시 반에서 9시 사이가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가장 적다. 나는 그 주에 개봉한 영화를 늘 M13번의 좌석에서 관람했다. M13과 M14는 2개의 좌석이 붙어 있는 좌석인데 바깥쪽인 M13을 예매하면 바로 옆 안쪽 M14에는 절대 누구도 앉지를 않는다. 그러니 여유롭게 두 좌석을 차지하며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대부분 전체 상영관에서 10명 남짓한 사람들이 주말 늦잠을 뒤로하고 그 자리에 앉아 있는데 거의 혼자인 어르신들이다.
코로나 시기 우리는 넷플릭스 같은 OTT 서비스로 영화관을 가지 않고도 상영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하루 종일 마음껏 콘텐츠를 즐겼다. 하지만 나는 코로나 때에도 마스크를 쓰고 좌석 띄워 앉기의 불편을 감수한 채로 꼭 영화관을 고집하곤 했다. 이유는 보고자 하는 영화 때문이라기보다, 내 발걸음으로 영화관이라는 공간에 도착해서 대형스크린을 향해 어두운 채 두어 시간을 꼼짝 않고 머무르기 위해서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내가 즐겨 이용한 영화관은 백화점 내에 있어서 쓸데없이 동선이 길거나 주차장과 거리가 멀거나 하지 않은, 입구에서 최단거리의 동선을 확보한 곳이었다. 토요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대충 옷을 주워 입고 10여분 거리 내에 있는 동네 대형마트 지하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바로 상영관이 나타났다. 무료주차는 4시간까지였고, 영화를 보고 나오면 보통 10시 정도가 되는데 그때 같은 건물의 대형서점이 문을 열었다. 서점에 가서 베스트셀러 동향을 살펴보고 책 좀 읽고 글 좀 쓰는 사람인양 몇 권을 훑어보는 행위가 나는 참 좋았다. 그 시간엔 서점에 사람이 거의 없어 유난히도 책 냄새가 널리 퍼진다. 사고는 싶은데 사버리면 잘 읽지 않는 인문학 책들도 몇 장 읽어보고 역사, 종교, 사회, 심리, 경제 분야를 지나치며 눈에 띄는 책이름을 찾아본다. 그중에 유독 어려워 보이는 책을 한 권 사고 여전히 혼자서 우아한 브런치를 먹으며 책의 목차를 살핀다. 그러고 집에 돌아와도 오후 1시가 아직이었다.
새로운 이야기로 파일 덮어쓰기.
“같은 공간, 같은 시간대에 다른 이야기를 넣어보세요. 지난 한 주간 내내 생각하던 이야기를 주말 정도에는 다른 이야기로 바꾸어 주는 시간이 필요해요. 스스로 해내기 어렵다면 억지로 영화라도 보는 거죠. 우리 뇌는 그렇게 파일 덮어쓰기 하듯 앞의 콘텐츠를 지우는 작업이 필요해요. 안 그러면 자면서도 한 가지 생각을 하게 되고 일속에만 빠지게 되죠. 워커홀릭은 일종의 정신병입니다. 강도가 점점 세져야 일했다고 느끼거든요. 술 하고 똑같습니다.”
1년 반 정도 공황장애 약을 처방받아먹은 적이 있다. 그때 정신과 의사는 내게 이전에 하고 있던 생각을 중단하는 방법으로 매주 새로운 영화를 보는 것을 권했다. 밤에 보기보다는 아침에 보라고 하셨다. 토요일 아침 개봉영화를 보는 일은 내게 어떤 일이든 과몰입을 방지하는 꽤 훌륭한 처방이 되었다. 지금도 나는 그 습관 때문인지 일주일에 한 번은 영화를 보는 편인데 새로운 이야기로 파일 덮어쓰기를 하면 세상이 달라진 건 아니지만 그 세상을 예민하게 느끼는 나의 센서는 조금 무뎌져 있음을 알게 된다. 일정한 루틴이 생기게 되면 그로 인한 안정감으로 다른 중요한 일을 매끄럽게 할 수 있다고 하지만 루틴자체가 지겨워질 때도 있는 것이 인간인 것 같다.
초여름쯤이었을까. 한 번은 광고가 다 끝나고 막 영화가 시작될 무렵인데 둘러보니 나를 포함해 좌석엔 다섯 명이 고작이었다. 영화는 공포영화였는데 시작부터 음산하니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채 10분을 상영하지도 않았는데 앉아있던 두세 명이 스르륵 빠져나가는 것이다. 스크린 오른쪽에 나와 왼쪽의 한 명, 언뜻 둘러보니 그렇게 두 사람만이 두 시간 정도 영화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에어컨 때문인지 내부 온도는 시원하다 못해 춥기까지 했고, 왼쪽 좌석에 홀로 앉아 있는 사람은 모자를 눌러쓴 젊은 남자로 보였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젊은 남자로 보이는 관객이 천천히 내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다. 다른 관객은 보이지 않고, 내가 도망갈 공간은 없어 보였는데 너무 무서워 나도 모르게 입을 막았다. 그는 내 바로 뒷자리에 앉아 끝까지 영화를 관람했다. 영화를 보면서 그도 무서워서 사람이 있는 쪽으로 자리를 바꾸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서워서 한쪽으로 앉아 있으려고요.”
영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뒤에 앉아버린 사람이 마치 영화 속 출연자로 느껴졌다. 그날의 영화는 기억이 나지도 않는데 그때 서늘하고 무겁게 내리 앉던 영화관의 공기는 가끔 영화관에 사람이 없을 때 어김없이 떠오르는 악성파일로 자리 잡았다. 어떤 파일은 단지 열어보았다는 이유만으로 바이러스를 전파시킬 때가 있지 않은가. 하지만 확실한 건 머리가 쭈뼛 서는 그날의 기억으로 교훈을 얻은 게 하나 있다. 어떤 일을 의도적으로 반복하는 경우의 수가 많아지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의 경우도 늘어난다는 것이다.
기획자는 행동하기보다 생각을 많이 하기 때문에 몸으로 부딪혀서 깨달아야 하는 직업과는 달리 경험의 공간이 한정적이다. 많은 곳을 다니며, 많은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고 자신 없어할 필요는 없다. 극적인 상황변수는 이처럼 안정적으로 느껴지는 반복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깊고 심각한 기억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파일 덮어쓰기는 이전프로젝트의 성공과 실패를 잊기 좋은 수단이기도 하다. 내 의지대로 기분을 전환시키기 어려울 때도 효과가 좋다. 사람은 원인과 결과만 있으면 어떻게든 그걸 이어 붙여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시키려 한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 머리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들로는 절대 이전 이야기를 삭제하지 못한다.
이처럼 기획자의 아침은 얼마든지 버라이어티 할 수 있다. 이야기를 정리하고 또 다른 이야기를 위해 이전 이야기를 덮어버리는 시간, 이 모든 거사는 아침에 결정된다. 그래서 나는 아침의 무게가 곧 기획자의 무게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