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자의 아침 _1 >
예를 들면 방금 락스에 소독이라도 된 듯 어제까지의 세균이 깔끔하게 박멸된 세면대와도 같아야 한다. 일곱 살 때 우리 집은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았다. 내 기억으론 연탄보일러였던 집에 겨울 아침의 세수는 딱 두 번의 세숫대야만큼만 허락되었던 귀중한 의식이었다. 빨간 대야에 고개를 숙이면 희미하게 어른거리던 내 얼굴. 엄마는 대야가 깨끗해야 한다고 매일 수세미로 대야를 닦으셨다. 지금처럼 흐르는 물에 세수를 하지 않던 시절에 세숫대야 가장자리엔 늘 얼굴의 기름때인지 알 수 없는 자국이 묻어 있었다. 엄마는 맑고 깨끗한 물에 세수를 해야 정신도 맑아진다고 하셨는데 나는 이상하게도 일어나기 싫은 아침엔 더욱 그놈의 세숫대야가 생각났다. 빨리 어제의 묵은 때를 씻어내야 하는데 그래야 새로운 아침을 시작하는데. 몇십 년이 지나도 왜 그렇게 빨간 그것이 생각났을까. 어떤 기억은 사소한듯해도 참 질기다. 다른 집에 갔을 때 우리 집만큼 깨끗한 대야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일까.
세수할만한 기분이 들지 않는 대야는 새로운 생각을 담아내기 힘든 뇌와 같다.
아침은 누구에게나 중요한 시간이다. 기획자에겐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가 아침 시간의 활용에 달렸다. 골프에서 백스윙 때 공의 운명이 반 이상 결정되듯이 아침은 그날 일어날 사건의 향방을 결정짓는다. 단순히 아침형 인간이 되어 부지런하게 일을 시작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아침에 깨어난 몸, 더욱 분명 해지는 뇌 활동, 제대로 처리하겠다는 마음가짐, 잡념을 버리고 생각을 하나로 모으는 집중력, 이 모든 것들을 하루의 시작부터 일찌감치 컨트롤해 나가라는 의미다. 나는 이러한 상태를 쫀쫀한 모닝이라고 일컫는다.
어쩌면 이 컨트롤은 아침에 눈뜨기 전 새벽 4시 정도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그때쯤이라면 아마 전날 밤 등장한 꿈속의 잔상을 붙들고 꿈을 더 진행해야 할지 마감해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아닐까. 그때 나는 못다 핀 꿈을 중단하고 오늘 아침은 무엇을 먹을지, 옷은 어떤 아이템을 입을지, 누구에게 연락을 할지, 어디서 만날지 나름의 하루를 그려본다. 어떤 날은 그 하루를 미리 그려보기가 싫을 때도 있다. 특히 싫은 사람을 만나야 할 때, 그런 사람과 밥을 먹어야 할 때 그런 날은 생각보다 행동을 앞세운다. 그냥 나간다. 머무르고 주춤해 봤자 시작하기는 더 싫어질 뿐이니까. 강연으로 유명한 어떤 인사가 그랬다. 나이 들면 일어나면서 이 생각 저 생각해봤자 몸만 늘어지고 괜히 아픈 것 같아 의지만 약해지므로 일단 무조건 튀어나가라고 하는 걸 본 적 있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아침이 시작하는 순간인 것 같아도 사실은 무언가를 시작하기 위해 멈추어 있던 모든 것을 중단하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동력전환. 꺼져있던 스위치를 켜고 다시 에너지를 끌어올리기 위해 자신만의 방법이 있어야 한다. 하루키가 그랬다, 면도도 매일 하면 철학이 된다고. 간단히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듣거나 샤워를 하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나는 우연히 알게 된 아로마 향을 깊게 들이마시며 마음이 편안해지는 순간을 마주하는 것으로 희미한 정신을 깨우곤 한다. 엄지와 검지로 집을 만큼 조그마한 병에 들어있는 용액을 다른 병에 옮겨두고 빈병을 가지고 다니며 답답할 때 병의 입구에 코를 대본다. 그 향이 좋아 여러 개를 구입해 하나는 핸드백에 하나는 거실 테이블에, 또 하나는 책상 위에 놓고 쉼표가 찾아왔을 때 향기를 활용하곤 했다. 꼭 향기가 아니더라도 감각을 일깨우는 자신만의 루틴이 있으면 좋겠다. 사우나에서 냉탕에 들어가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람이라는 이야길 들은 적이 있다. 체질이나 기호의 문제가 아니라 냉탕에 들어가면서 매번 자신만의 다짐을 새로이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획자는 감각이 깨어있는 사람이다. 아침은 잠들어 있는 감각을 깨우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또 하나, 나이 들면 더욱 실감하는 것인데 날씨를 인지하는 일도 중요하다. 예민한 기획자에게 날씨는 그날 하루의 커다란 변수이다. 덥지도 춥지도 않고 햇살도 바람도 습기도 적당해 나만 정신 차리고 집중하면 될 것 같은 날들은 그리 많지가 않다. 원치 않는 비는 항상 생각보다 많이 오며, 끈끈한 밤은 웬만해선 물러가지 않는다. 봄은 오지도 않았는데 제 맘대로 가기 일쑤고, 가을은 만나러 가는데 허탈하게 도망가기 십상이다. 문제는 외부자극에 해당하는 날씨가 나의 육체와 마음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이다. 사람마다 에너지를 더 적극적으로 발휘하게 되는 계절이 있다고 하는데 좁게 생각하면 마찬가지로 사고의 효율성이 극대화되는 날씨도 있기 마련이다.
내가 좋아하는 아침 날씨는 꽤 많은 비가 온 다음 날이다. 아직은 완전히 마르지 않아 반쯤 젖은 아스팔트 위에 촉촉한 구두소리가 귓전에 감길 때, 늦여름이나 초가을 그렇게 옅은 바람이 훅 지나가는 아침이다. 젖은 아스팔트는 적당히 어제의 잔상을 남기고 오늘 아침의 심장을 조심스레 두드린다. 생각은 떠오르는 것이 아니고 지나가는 것. 지나가던 생각을 붙잡아 내 손과 눈앞에 끌어다 놓고 시작하는 것, 그것이 기획자의 아침일 것이다.
혹자들은 저녁형 인간도 있어 아침에 충분히 자고 12시 다 되어 일어나 아점을 만족하게 먹고 오후 한 두 시부터 슬슬 뇌를 가동한다 한들 무엇이 문제냐 할 수도 있다. 오후에 손님을 만나고 저녁부터 워밍업 한 후 밤 11시 이후 본격적으로 집중력을 발휘해서 모두가 잠든 새벽녘에 승부를 본다고 말이다. 실제로 밤과 새벽에 더 무언가를 쏟아내는 분들을 보기도 했다. 하지만 건강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제쳐두고서라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썩 효율적인 방법이 아니다. 그러다 보면 꼭 중요한 일, 특히 집중해야 하는 문서작업들을 나중으로 미루게 된다. 낮에 시간이 비었을 때도 저녁이 될 때까지 기다리다가 그 시간을 흘려버리기 쉽다. 밤에 작업을 하는 스타일은 나쁜 습관을 만들어낼 확률이 매우 높기에 기획자가 될 생각이라면 절대 찬성하고 싶지 않다. 중요한 생각은 무조건 아침에 하라. 그리고 저녁이 되면 털어라.
기획자는 아침을 먹는 게 좋다. 식사가 아니더라도 무언가 씹고 시작하는 것이 좋다. 밤새 꾹 닫았던 입을 열고 씹어야 한다. 저작운동은 무기력을 막아준다. 아니면 빨대를 꽂고 우유라도 빨아야 한다. 얼굴근육에 긴장을 주고 호흡을 기다리게 된다. 커다란 셰이크에 미숫가루와 꿀을 넣고 마구 흔드는 것은 어떤가. 손의 감각과 흔들어대는 아귀힘이 만나 비로소 오늘 하루 에너지를 작동시켜 줄 것이다. 기획자는 오전 10시까지 그날 할 일을 다 승부 지어야 한다.
어쩌면 이 모든 과정은 내가 하고 있거나 해야 할 그것을 위해 다른 잡념이 들어오지 않도록 생각의 커튼을 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을 모닝셔터라 부른다. 단 하나의 생각을 위해 다른 생각을 단속하는 아침. 단단한 아침을 위해 스스로를 부팅하는 시간. 이렇게 시작한 아침과 그냥 지나온 아침은 그 결과가 확연히 다르다. 프로젝트를 받았다면 기획자는 그 순간부터 모닝셔터 모드를 가동해야 한다.